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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 노복환 서전 (三溪 盧福煥 書展)
  • 이용진 기자
  • 등록 2016-10-05 14:30:15
  • 수정 2016-10-07 10:2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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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10. 5 ~ 10. 11 갤러리 라메르 1층

서예는 고답적(高踏的)인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속세에 초연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고답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현실에 무관심하여 현실감을 상실하거나 현실 도피적인 속성을 지닌 것을 특징으로 삼지는 않는다.


서예의 본질이 인문학적 사유와 정신의 산물로서의 예술세계인 만큼 그 내적 깊이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예를 대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들은 서예의 외적 표현과 더불어 그 이면에 내재한 정신성, 깊은 인문학적 사유세계, 현실 안주를 넘어선 이상적 지향성, 필묵에 담은 예술적 가치 등이다.





물론 서예에 대한 기존관념이 강하게 배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서예의 본질을 좀 더 명료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즉 서예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관념에 서예의 본질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서예의 본질적 요소들은 서예를 고착화, 규범화, 확산성 규제, 변화의 질적 가치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서예의 범주에 안주하려는 현상으로 인하여 부정적 요소를 만들었을 뿐, 오히려 서예의 긍정적, 창의적 요소를 오히려 더 명료하게 인식시켜 준다는 의미가 있다.


한 번 뒤집어 생각하면 서예의 고차원적 예술세계를 무궁무진하게 확장시킬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서예를 미화하거나 상찬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서 서예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 현재보다 미래에서 서예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 확신한다.


서예에 대해 착각을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모두가 ‘전문 서예가’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취미나 교양으로 서예를 하는 경우까지도 ‘전문적으로 하는 서예’로 착각하여 한국 서예의 현단계 수준을 상당히 낮추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서예를 ‘그들만의 잔치’로 지칭하며 비아냥거리는 글들을 대할 때가 간혹 있다. 서예 전시에 일반인들의 관심은 전혀 없고, 서예가들 사이에서만 서로 칭찬하고 떠받든다고 하는 말이다. 그런 말들은 서예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비하를 일삼은 데서 비롯되었다. 조금 넓혀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서예가 대중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지 않는 편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서예가 온전히 ‘그들만의 잔치’는 아니다. 모든 분야의 행사에 관련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대중문화를 제외하고 본격 예술분야의 행사가 일반인의 참여와 관심을 끄는 현상이 얼마나 되는가? 중앙일간지와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해야만 중요하고 비중 높은 전시, 공연 행사인가? 그렇지 않다. 어차피 언론은 시청자와 독자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신문과 방송의 보도 태도는 지극히 자사의 편집, 보도 방침에 따라 이뤄지고, 기자의 인식 수준정도에 따라 달라질 뿐 그것이 예술 행사를 척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서예는 고급 예술이다. 저변 확대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지만 고차원적 가치와 의미와 상징성을 버리고 평준화하는 현상, 대중적 눈높이에 맞추고자 낮아지는 현상은 피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는 세부적인 분류가 있기 마련이다. 서예 역시 세부적인 구분과 수준과 목적과 지향점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차원 예술로서의 서예가들을 고고한 존재,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예술세계라고 선을 긋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저급한 글씨’들을 착각하여 서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잘못된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서예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형태와 수준과 의미와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서예 세계를 대중의 인기를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삼계 노복환 선생의 전시회 소식을 미리 전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은 서예에 대한 잘못된 인지가 서예에 대한 이미지를 잘못 고착시키고, 전문서예가들조차 대중적 관심과 인기에 연연하거나 휘둘리는 현상이 못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삼계 선생의 전시작품을 미리 보면서 고차원의 예술로서의 서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서예는 인문학이 총체적으로 수렴되고 용해되고 현대 문화예술전반이 융화된 결과물이다. 이는 서예라는 바다를 이르는 것이고, 이 너른 바다에서 각각의 서가들은 각각의 개성을 지닌 작품들을 생산해낸다. 그 개성과 창조적 시도가 두드러지면 질수록 서예의 바다는 풍성한 유기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삼계 노복환 선생은 두드러진 개성,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 창신(創新)은 처음 시도하는 단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뒤이어 확산시키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꼬리를 물고 창신을 낳는다. 그런 점에서 선구자적 자세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높이 기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삼계 선생과 친분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선구자적인 시도를 목격하였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2003년 개인전에서는 작품지에 색을 들이거나 여러 색을 혼합한 다양한 배색 표현, 낙관의 위치 변화 등은 현대 사회의 영상 이미지를 작품에 적극 차용하였다.


특히 테마와 이벤트를 달리해서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라던 계획에 따라 2007년 개인전에서는 갑골·금문의 자형은 존중하면서도 본형에 얽매이지 않고 현대적 감각이 가미된 변화와 시도를 보여주었다. 도록을 편집하면서는 작품의 상하 혹은 좌추 경계를 지면 밖으로 터버리는 시도를 하였다. 서예 작품을 아크릴로 표구하였다. 석농체(石農體, 명조체) 작품도 선보였다.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시도와 더 많은 방법적 확산을 낳기도 하였다.




이번에 시도하는 도록 편집 방식, 표구 방식 등은 서예의 표현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한다. 먼저 삼계 선생의 이번 전시작의 특징을 살펴보자.


50여 작품을 물경 15서체로 썼다. <법구경 8폭병풍>은 8체로 썼다. 한국 한시(韓國漢詩)만 선택한 것도 특징일 것이다. <명조천자문(明朝千字文)>은 3박4일 꼬박 매달려 완성하였다. 이미 삼계 선생은 ‘초서’ ‘행초서’ ‘갑골금문’ 천자문을 전시회마다 선보였다. 이번에는 <명조천자문>인 것이다.


작품지로 한지(韓紙) 또는 고지(古紙)만 사용하였다. 한지는 보온성과 통풍성이 뛰어나며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수명이 매우 길다. 한지, 고지만을 사용하는 것은 500년 이상 작품이 보존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주로 사용하던 비단 대신 천연염색한 명주로 여백을 배접하였다. 나무 액자에만 국한되지 않고 판넬, 아크릴(Acrylic), 디아섹(Diasec) 표구도 시도하였다. 이렇게 표구한 것을 도록에 실물 그대로 촬영하여 작품과 나란히 수록하였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자칫 잘못하면 소재주의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표구도 예술이다’는 인식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표구는 서예 작품을 받쳐주고 돋보이게는 하지만 표구 자체가 서예작품을 대체할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삼계 선생은 서예 작품의 예술성을 먼저 생각한 후 이를 잘 드러내기 위하여 표구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가 요소에 더 큰 관심을 환기시킬 소지가 있다. 독특한 표구 방식, 공들인 천연염색 등은 서예작품의 가치를 배가시킬 수 있지만 자칫 서예에 대한 관심을 희석시킬 소지도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작품집에 이런 작가노트를 수록해 놓았다.


自治!

‘자기의 일을 스스로 처리함’

나의 신조는 ‘自治’다.

自治를 전 과정의 목표로 삶고, 自覺의 실천 단계를 쌓아가는 것.

그렇게 서예와 일상의 삶을 살아가려 하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삼계 선생을 대할 때마다 늘 깨어있고자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았다. 바로 ‘자치(自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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