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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 5> 위풍당당한 불
  • 편집부
  • 등록 2025-02-27 14:2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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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奉化 北枝里 磨崖如來坐像)
  • 국보 제201호(지정일 1980. 9. 16), 소재지 :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산108-2번지
  • 김재필 사진작가 · 필아트영상 대표


위풍당당한 불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奉化 北枝里 磨崖如來坐像)


국보 제201호(지정일 1980. 9. 16), 소재지 :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산108-2번지


김재필  (사진작가 · 필아트영상 대표)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 / 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 / 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 / 떠나려니 생각나네 / 햇밥 고기 생각나네 / 울고 왔던 억지 춘양 / 떠나려 하니 생각나네…”


보호각 속에 안치된 마애여래좌상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일대에는 <억지춘양>이라는 속요가 전하고 있다. 철도가 없고 도로도 발달하지 않아 교통 여건이 좋지 않았던 시절 봉화 춘양은 한반도에서 상당히 외진 곳이어서 외지에서 시집을 온 부녀자들이 이 춘양에 한 번 들어오면 다시 가는 친정 길은 마음뿐이었고, 그래서 가기 힘든 발걸음을 ‘억지춘양’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이처럼 봉화지역은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자리한 높은 산과 깊은 골이 많아 자연 청정지역으로, 요즘은 힐링 차원으로 찾는 이가 많아졌으나 전에는 산세가 험한 지역적 특징으로 찾는 이가 적었던 상당히 깊은 오지다.

중앙고속도로 풍기IC를 나와 지방도 915호를 달려 봉화 시내에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가는 길을 가다 보면 산간지대 안에 넓은 들판이 펼쳐진 물야면 북지리가 나온다. 이곳은 낙동강의 상류 지역으로 내성천이 흘러 다른 산간 지역에 비해 수자원이 풍부하여 논농사가 잘되고 사과, 인삼을 재배하는 작은 평야지대다. 

잠시 차를 세우고 앞을 올려다보니 태백산맥의 한 켠을 차지한 호랑이가 걸터앉은 형국을 지닌 북지리 호골산(283.4m)이 나즈막하게 길게 누워 있다. 다시 이정표를 따라 북지교를 건너니 오늘 답사하려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지림사(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에 다다른다.


우측에서 본 모습


신라시대에 이곳 일대는 ‘한절’이라 불리는 큰 사찰과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남쪽의 경주와 같은 불국토를 이루었다는데, ‘한절’이 곧 지림사를 일컫는다. 

한편 축서사의 창건 일화에도 지림사가 나오는데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지림사의 주지가 문수산 쪽을 바라보니 멀리 상서로운 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의상에게 말하니 의상이 확인하고 그 빛이 나오는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사찰이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때 스물일곱 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렸다던 지림사는 넓은 경내에 비해 초라하게 퇴락되어 있었다. 중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는 설과 문수산의 ‘축서사’로 인하여 사세가 기울었다는 설이 있으나 일주문도 없는 경내에 들어서니 축구장 크기의 넓은 경내에 한쪽으로 대웅전, 원통전, 마애불 보호각 등 전각들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도량이 황량하게 느껴져 불국토의 찬란했던 영광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마애불이 발견되기까지 이곳은 나대지로 방치되어 있던 중 1947년 한 비구니 스님이 꿈에서 부처님을 뵙고 다음 날 지림사 터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위는 덤불로 뒤덮이고 아래는 땅에 묻혔던 걸 발견하였다. 마애불은 1,400년만에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 후 마애불의 보존 관리를 위하여 보호각 1동을 신축하여 실내로 안치했으며, 1949년에 권보훈이라는 승려가 수월암(水月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세우고 전통을 유지하다가, 2009년부터 대웅전을 비롯한 부속 건물을 다시 짓고 사찰 이름도 지림사로 개명하여 옛 지림사의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

마애불 보호각은 호골산의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끝자락으로, 입구에서 보아 경내 왼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높이 5m, 너비 4m의 커다란 암반에 새겨진 높이 4.3m의 거대한 불상이다. 자연암벽을 파서 만든 감실은 멸실되었으나 불신은 원각의 고부조로 새겼다. 기반이 되는 암반으로부터 가장 높게 튀어나온 부분은 무려 1.8m나 된다고 하니 바위 속에서 부처가 나 앉은 것처럼 보인다. 


좌측에서 본 모습


경주 남산의 마애불에 매료되어 20여 년 동안(1970년부터 1990년까지) 20여 차례 넘게 한국을 찾은 일본인 여류화가 히라노 교코((平野否子)는 그의 저서 『신라인과의 대화』 97p에서 “조각하기 전부터 부처님이 바위에 숨어 계시다가 신앙심이 깊은 신라의 석공들이 그 부처님을 바위 면에 나타나게 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라고 했다.

어디 이곳뿐이랴. 이 표현은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고부조(高浮彫)의 모든 마애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두상은 불신과의 비례가 좀 맞지는 않으나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 큼직하며 방형의 양감이 풍부한 얼굴은 풍화와 침식을 비킬 수 없었는지, 너무 심하게 마멸되어 자세한 표정을 읽기는 어렵다. 그러나 입가엔 고졸한 미소가 옅게 드리워져 있고, 눈의 동공이 파여 있는데 이는 근처 영주의 가흥동 마애삼존불과 신암리 마애삼존불에서도 볼 수 있으니 이 지역의 잘못된 신앙(미신이거나 조선시대의 일부 몰지각한 유가들의 행위 등)인들이 저질러 놓은 훼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짠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불신은 당당한 체구로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 여원인의 수인을 취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손이 안 보여 두리번거려 보니 손목부터 떨어져 좌대 옆에 따로 놓여있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왼손은 아래를 향한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다.

불신의 의상도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 그 형체가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양 어깨에 걸쳐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 형태로 새겨져 왼팔을 전체적으로 덮고 쭉 이어져 내려와서 가부좌를 튼 양다리 및 무릎을 지나 대좌까지 늘어져 있어 신라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고식(古式) 양식을 취하고 있다.


상호


화불


광배는 머리 뒤의 두광과 몸체 뒤의 신광이 모두 존재하는데, 두광의 중심은 연꽃으로 장식하고 7구의 화불이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애처롭게도 좌측의 절반이 깨져 반원 상태로 남아 있다. 우측에 2구의 화불(化佛)과 연꽃무늬 장식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조각 당시에 화불들은 모두 연꽃 대좌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광의 경우, 본 마애불상 좌우로 상하로 화불이 둘씩 있어 모두 4구가 조각된 것 같은데, 이 역시도 전체적으로 마멸된 정도가 심해 2구만 보일 뿐 나머지는 상세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태다.

이 마애불은 조성 시기나 경위가 전해지지는 않지만 불상의 얼굴이나 의상의 표현 기법이 근처의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보물 제221호)과 비슷한 걸로 보아 “7세기 전반의 고신라 불상일 가능성이 많지만 제작연대는 7세기 후반인 신라 말, 통일신라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문명대 著, 『마애불』, 66p)

이 시기는 660년에 백제와 668년 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676년 대동강 이남에서 당나라 군대를 모두 몰아내어 명실공히 완전한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시기로, 통일신라는 이때부터 태평세월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주의 마애불과 이곳의 마애불이 이때 조성된 것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국가적 차원의 국태민안을 빌기 위한 발원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마애불들이 농사에 쓰이는 물이 흐르는 낙동강 상류인 내성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걸로 보아 농부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호족들이 조성한 것일까?

마애불은 나의 의문에 답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다.


불신에서 떨어져 나온 오른손


내부 촬영을 마치고 보호각을 나와 10여 미터 앞에서 전경을 촬영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니 나이 지긋한 보살 두 분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삼배를 올리고 있다. 장중한 마애불 앞에 선 그들을 보니 한없이 작아 보인다. 그건 크기를 비교한 것이 아니다. 1,400여 년의 세월이란 시공을 넘어 온 마애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불심으로 회오리쳐 그들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님들 부처님께 무슨 기도를 하셨어요?”

“기도는 무슨 기도? 그냥 삼배만 올리면 되지예. 부처님께 뭘 원하는 게 있다는 건 그만큼 잘못 살아왔다는 것인디, 그러면 부처님 앞에 부끄럽지예.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살아온 건만도 고마운 일이제.”

갑자기 이곳까지의 여정으로 지쳤던 심신이 곤두박질치더니 한 마리 나비처럼 가벼워져 나를 따라다니던 상념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기도의 의미를 촌부들의 이 말에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경내를 벗어나 시공을 넘어 마애불을 조성한 석수쟁이를 만나러 나섰다. 간절한 불심에 의해 손끝에 핏물이 들어도 아픔을 모르고 화강암에서 부처를 모셔내온 그가 옹이 진 긴 세월을 건너와 내 앞에 서 있다. 그는 풍화와 침식으로 일그러진 얼굴, 떨어져 나간 오른손, 마애불의 어렴풋한 미소를 쳐다본다. 상처투성이인 마애불을 보고 있는 그의 심정이 궁금하다. 

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싸한 겨울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나 혼자 서 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묵직하게 가슴을 헤집는다. 일상의 번잡함과 나를 흔드는 것들을 정지시키고 나를 찾던 여느 때와 달리, 하나의 작은 생명체가 되어 다시 마애불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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