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들의 정신적 지주와 호국불교의 도량처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慶州 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국보 지정일 : 1979. 5. 22,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건천읍 단석산길 175-143 (송선리)
김재필 (사진작가 · 필아트영상 대표)
진달래가 산간을 점점이 선홍빛으로 물들이던 계절에 지인(경주의 사진인)의 안내를 받으며 세 번째로 신라인들의 불국토인 경주를 찾았다. 경주에 있는 토함산(吐含山), 금강산(金剛山), 함월산(含月山), 선도산仙桃山)과 함께 신라인들이 신성시한 경주 오악(五嶽) 중의 중악(中嶽)으로 불리는 해발 827.2m 높이의 단석산(斷石山)에 위치한 신선사마애불상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 산은 경주 시내를 벗어난 건천읍과 산내면에 걸쳐 있어 삼국의 영토분쟁이 치열할 때 백제군들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과 청도를 거쳐 경주로 쳐들어왔던 길목이다. 원래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으로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 산에서 수련했던 곳이라 한다.
ㄷ형 석굴의 마애불 배치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국 김수로왕의 13대 후손인 김유신(595~673)이 15세에 화랑이 된 뒤 17세에 삼국 통일의 포부를 안고 입산하여 목욕재계하고 고구려와 백제와 말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러자 4일 만에 난승(難勝)이라는 한 노인이 나타나 신검(神劍)과 비법이 담긴 책을 주었고, 그는 그 칼로 무술을 연마하면서 단칼에 바위를 내려치니 두 개로 갈라졌다 한다. 산정상에 그 ‘단석(斷石)’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그 후로부터 산 이름이 단석산으로 불리었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주 단석산 항목에는 그 같은 구전을, 『동경잡기』에는 경주 근교 유징동에 마애불이 있는 석굴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북암 맨아래 여래입상
북암1 상단의 삼존불 및 반가사유상 (왼쪽부터 여래입상, 보살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
신선사 마애불상군을 찾아가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산 입구 공원관리 초소에 주차를 하고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을 40여 분 올라오니 신선사에 다다른다. 신선사는 7세기에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한 신라의 고승 자장대사의 제자 잠주(岑珠)스님이 창건한 석굴사원으로 법화종 사찰이다. 사찰 앞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 사찰에 대한 전설을 들려준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노인들이 바둑을 두는 걸 구경하고 집에 오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 했다. 듣고 보니 신선사(神仙寺)라는 이름이 걸맞게 들린다.
창건 초기엔 화랑 낭도들과 신도들이 야단(野壇)에 법석(法席)을 차렸을 정도로 큰 석굴사원이었을 텐데 1,3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작은 암자로 쇠락하여 관음전을 비롯한 세 채만 남아 있다. 찾는 이도 거의 없는 듯 사찰 주위에 탐스럽게 피어 있는 산꽃들도 을씨년스럽게 보였으나 경내를 흐르는 독경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이 어우러진 합창은 신선들의 노랫소리로 들린다.
관음전 오른쪽으로 나무데크를 따라 50여 미터쯤 걸어가니 마을 사람들이 탱바위라 부른다는 높이 10m, 길이 18m, 너비 3m의 상인암(上人岩)이 ㄷ자 형태로 남, 북, 동면으로 둘러쳐져 석굴 모양처럼 배치되어 있다. 서쪽으로 난 입구에 들어서니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 공양인상 등 바위 면에 새겨진 10구의 조각상들이 장관을 이룬다.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에 새겨진 ‘마애불상군’이 나를 압도한다.
국보로 지정된 우리나라 마애불은 7곳으로, 신라시대에 조성된 경주지역의 많은 마애불 중 국보로 지정된 곳은 경주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과 ‘단석산 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두 곳뿐이다.
1969년 5월초 신라삼산학술조사단(단장 김상기 박사)은 이 석굴을 조사, 1천3백여 년 전 신라 김유신 장군이 수도하던 유적임을 밝혀내는 한편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사원임을 확인했다. 당시 조사단의 황수영 박사는 군위 석굴이나 토함산 석굴보다 2,3백 년 앞선 것이라고 판단했다. 높이가 8m에 달하는 3면 암벽의 안쪽에 양각된 이들 불상은 동안으로 보이며 소박한 솜씨로 새겨져 있다. 삼존불의 높이는 6m. 그 밖에도 2m 남짓한 반가상과 여래입상 등 6구가 있으며, 공양 올리는 일반인의 모습이 2구가 새겨져 있다.
서쪽으로 난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이 북암(北巖), 정면이 동암(東巖), 오른쪽이 남암(南巖)이다. 동암의 본존불에 잠시 합장하고 천천히 촬영하며 둘러본다.
북암1 하단의 공양인상
북암2의 여래입상(본존불)
동암의 관음보살입상
북암에는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동쪽으로 가리키고 있어 도면쪽에 가까이 있는 본존불로 안내하는 자세다.
첫 번째 여래입상인 높이 1.05m의 이 불상은, 이곳에 새겨진 세 입상 중 조각이 가장 선명하다. 보주형(寶珠形) 머리 광배와 연꽃잎(伏蓮)으로 장식된 대좌를 딛고 서 있는데, 연꽃무늬에는 자엽(子葉)이 표현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둥글고 큰 상호(相好, 얼굴 모습)에 비해서 육계가 지나치게 작아 특이한데, 두 눈은 부어오른 듯한 초기 석조불상의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귀는 길고 목의 삼도는 표현되지 않았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왼손은 옆의 다른 두 상과 마찬가지로 안쪽에 자리한 본존불 미륵여래입상을 가리키고 있어 그곳으로 인도하는 듯하다.
두 번째 보살입상은 전체 높이 1.02m의 정면상으로서 머리에는 삼각 보관을 쓰고 있으며 목에 삼도는 없다. 법의는 양 어깨를 걸친 통견(通肩)인데, 배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루고, 다시 두 팔에 걸쳐서 몸쪽으로 길게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왼손은 미륵불 쪽을 가리키고 있다.
세 번째 여래입상은 보주형 머리광배를 갖추고 있으나 발밑의 대좌는 분명치 않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아래로는 치마주름이 보인다. 왼손은 역시 안쪽을 가리키고 있다. 높이는 1.16m이다.
네 번째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으로 연화대좌와 원형 머리광배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삼면관을 쓰고 어린아이 얼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도는 표현되지 않았으며, 상반신에는 법의를 걸치지 않았다. 오른손은 오른뺨에 대고 있어 사유(思惟)하는 모습이며, 왼손은 아래로 내린 왼쪽 발의 무릎에 얹어서 통형(通形)의 반가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 높이는 1.09m이고, 전체의 형식에서 보면 국보 78호, 83호 반가사유상과 유사하다. 원래의 위치에 있으면서 광배와 대좌를 갖춘 고대 신라 유일의 마애반가사유상이다. 얇게 조각되어 있으나, 선각(線刻) 부분은 분명하다.
반가사유상이란 일반적으로 왼쪽으로 다리를 내리고 그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은 일종의 반가부좌의 자세로 왼손은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쪽 팔꿈차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뺨에 대어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보살상을 말한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고뇌하는, 태자인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태자사유상에서 유래된 반가사유상은 3세기경 인도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자사유상의 예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곳, 지금 보고 있는 반가사유상이 ‘미륵석상’이란 명문이 있어 우리나라의 여타 다른 반가사유상은 보살로 되어 있으나 이곳 반가사유상은 부처의 반가사유상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또 다른 마애반가사유상은 9세기에서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북에 있는 ‘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에 있는데, 조성 연대가 이보다 3~4세기 늦다.
나의 호기심을 발동케한 것은 그 밑에 조각되어 있는 버선코 같은 모양의 뽀족한 절풍(折風; 삼국시대 남자들이 쓴 위가 뽀족한 관모)을 쓰고 공양을 바치는 자세를 한 전체 높이 1.22m의 공양인상(供養人像)이다. 공양인상도 미륵보살반가상을 포함한 4기의 불상군처럼 동면의 본존불을 향하고 있다. 마애불의 일반적인 도형에서 볼 수 없었던 공양인상을 자세히 보니 앞에 선 인물보다 뒤에 선 인물을 좀 작게 조각하여 원근감을 주었다. 삼국시대의 복식으로 볼 때 주로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썼던 절풍을 쓰고, 신라인들이 입었던 긴 상의에 통바지를 입은 복식이 특이하다. 신라 때의 복식은 토우에서 약간 볼 수 있으나 이 공양인상에서처럼 뚜렷하게 보인 것은 유일하다. 이 복식을 본 김상기 박사는 “웃옷이 길고 아래는 바지에 대님을 맨 것이 고구려 벽화의 의상과 유사함을 보인다.”는 의견과 함께 그것이 화랑의 평복일지도 모른다고 연관시켰다.
두 눈이 뚜렷이 표시되어 있어 위장부(偉丈夫)처럼 보이는 앞의 인물은 손잡이(柄)가 달린 병향로(보는 순간 정병인지 병향로인지 판단이 서지 않다가 2003년에 경남 창녕 말흘리 유적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자루가 달린 병향로(柄香爐)가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생각나 유추해 보니 병향로임을 확신해 본다.)를 들고, 하인이거나 한 계급 낮은 인물로 보이는 자가 나뭇가지(꽃가지?)를 들고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 중에서 꽃과 함께 향을 일컬어 향화(香華)라고 하여 불교에서는 향과 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이 공양인상을 보니 신라인들의 일상적인 종교 생활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남암의 지장보살 입상
북면에 새겨진 미륵여래입상은 삼국시대의 마애불 중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작품인 본존불(本尊佛)로 8.2m 높이의 거대한 장방형의 바위에 새겨진 대형 미륵불이다.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서쪽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머리 위에는 특이하게 2단으로 된 육계(肉髻)가 작게 솟아 있고, 목의 삼도는 표현되지 않았다. 가슴 사이로는 띠 매듭이 보이고 중후한 체구, 둥글면서 어린이와 같은 천진스런 얼굴, 통견의 법의, 좌우 대칭의 조각 수법, 다섯 손가락을 편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通印) 등이 경주의 배리삼존불과 비슷한 형상이다.
팔과 팔목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으며, 수인은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다. 본존불이 미륵불인 것은, 화랑을 일컬어 용화낭도(龍花郎徒; 용화향도)라 불렀는데, 이는 미륵신앙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양 무릎 위에는 상체에서 이어진 동심타원형 옷주름을 성글게 표현하였으며, 발가락이 뚜렷하게 표현된 두 발은 가지런히 모아 정면을 향하고 있다.
남암에는 바위에 마모가 심한 지장보살이 홀로 우뚝 서 있다. 전체 높이 약 2.1m이며 얇게 새겨져 있어 긴 세월에 마멸과 손상이 심해 조각선을 찾기가 어렵다. 민머리(지금까지 보아 온 지장보살은 대개 민머리로 표현했다.)이고 광배가 없으며, 동면의 미륵여래입상과 동면의 관음보살상과 함께 삼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은 지장보살로 알려져 있는데, 이 보살상의 동쪽 면에는 380여 자의 글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1969년 신라 오악 조사단이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200자를 판독했다는 19자씩 20행으로 이루어진 약 380여 자의 명문이 보인다. ‘경주상인암조상명기(慶州上人巖造像銘記)’로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단석산 신선사 석굴
동암에는 광배가 없는 높이 3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법의를 걸치지 않은 듯이 보이며,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보병을 쥐고 있다. 머리에 보관이 없어 관음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손에 든 보병으로 인해 관음보살로 판단한 듯하다.
7세기 전반기의 신라의 석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始原)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겠다.
당시 신라 왕실의 비주류였던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화랑들을 수련시키고,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강녕을 위해, 호국불교를 염원했던 백성들의 기도처였던 석굴을 나오니 한 줄기의 바람이 싸하게 머리 위를 스치며 지나간다.
오늘따라 이 바람이 ‘1,500여 년의 우리 문화의 맥을 외면하지 말라는 깨우침의 죽비’처럼 느껴지는 건 어인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