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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向人尋書 : 사람에게서 서예 찾기 · 3> 평설, 이젠 말해 보자
  • 편집부
  • 등록 2025-02-12 16:44:58
  • 수정 2025-02-12 16: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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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작품과 작가, 그리고 작품 평설
  • 인재 손인식 (서예가)

평설, 이젠 말해 보자


- 작품과 작가, 그리고 작품 평설 


인재 손인식  (서예가)


필자는 한국서단이 낳은 작품과 작가를 향한 평설(評說)을 기획한 적 있다. 걸음까지 뗐었다. 서예와 전각과 문인화 등 작품과 작가 활동을 책과 영상으로 풀어내자는 의도였다. 기획 내용이 곧 평전(評傳)과 다르지 않다. 다만 평전을 작고 작가 대상으로 여기는 일반적인 정서가 있어 필자는 본고에서 그냥 ‘평설’이란 단어를 사용하겠다.

이 기획은 당시 건강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풀고 싶고,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지금이 그때이지 싶은 거다. 훌륭하고 가치 높은, 이 시대의 시공을 이끄는 작품과 작가들이 필자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우리 함께 존중해야 할 한국서단의 대표작과 작가들을 차근차근 기록하는 것이 이 시대 동도들의 소명 아닐까?


하석 박원규, 虎 (2010년 한길사 초대 하석 박원규 개인전 <字中天> 전시작)


사회적 지원과 컬렉션 촉진을 위해

자, 어떤 작품과 작가를 평설의 대상으로 삼을까? 본고를 읽는 작가들께서 추천한다면 어떤 작품과 작가를 평설 대상으로 내세우시겠는가? 자기 작품인가? 다른 작가의 작품인가? 아무래도 다 좋다. 의미를 부여해서 좋을 이 시대의 작품과 작가들이 있음은 공감과 긍정이고 희망이니까.

창작품이라면, 자기 창작을 하는 작가라면 누구나 평설의 대상이다. 평설 풍토가 활발하면 곧 그 장르의 예술이 융성한다. 세상에 알려진 작품 다 누군가가 한 처음 느낌을 드러냄으로부터 두루 회자되었다. 알면 말하고 싶고, 알아야 말할 수 있음은 인지상정. 자기의식 넘친 작품이라면, 자기 창작을 하는 작가라면 모두 조명을 받을 자격 있다. 평설로 인해 즐거움을 느끼고 안목 높아진 대중이 생기고, 그렇게 될 때 서단 또한 풍성해질 것이니.

자, 그럼 우리 함께 평설 우선순위에 둘 작품이나 작가 선정에 관해 기준을 잡아보자. 기록적인 작품이면 마땅하리라. 서예의 본질을 기반으로 한 퓨전 작품들도 대상이다. 물론 작품의 품격도 절대적이다. 기록적 특성과 작품의 품격을 갖췄다면 이런 작품은 대중에게 이슈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장르별, 서체별 대작이나 연작이면 더 좋으리라. 이는 기관에서도 인정할 기준으로 좋다. 사회적 지원 운동과 컬렉션 촉진 활동을 펼치기도 쉬워진다.


하석 박원규 자필묵연 태노사(太老師) 작품 ‘冊’(서울역 3층 로비) 앞에서


하석 박원규 선생이 25년을 계속하여 주제 연작과 작품집 발간 족적



평설의 필요성 두 가지

췌언 같지만 평설이 필요한 이유 두 가지만 꼽겠다. 첫째, 때마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야기, 즉 스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슈로 이목을 끄는 작품이 있다면 곧 그 작품의 작가가 곧 스타다. 때문에 대중을 작품과 작가 속으로 모셔야 한다. 흥미로운 스토리를 함께 엮어서. 그러기 위해서는 서단의 작가들이 먼저 대중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가 낳은 수작들을 함께 존중하고, 이 시대를 이끄는 작가들을 전체가 나서서 스타로 띄워야 한다. 결론적으로는 서로 스타가 되고 웃음과 박수를 보내는 대중이 되는 거다.

예컨대 이런 TV 프로그램이 있다. 한 역사학자가 흥미진진하게 강의를 한다. 거기에 스타 심리학자, 저명한 물리학자와 과학자, 유명 탤런트와 가수, 소위 한가락 하는 유명인들이 청중으로 참석한다. 교양과 예능 사이 어느 지점에서 고도의 공감대를 형성하겠다는 노림수 큰 프로그램이다. 모두 알 것이다. 최근엔 다 이런 식으로 어려운 전문분야, 읽어도 이해 안 되는 고전들을 풀어내며 대중에게 다가간다.

왜 우리가 우리 시대의 작품을 즐기고, 우리 시대의 작가를 사랑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즐기지 않는데 누구라서 내 작품을 환호하랴. 서로 존중해야 한다. 공유하고 그것을 존중하고 즐길 때 그것은 진정 우리 공동의 것이 된다. 영상으로 풀어내는 것, 완성이 아니다. 그 작품과 작가가 지닌 특성을 접근성 좋은 방법으로 알리기다. 이 알리기 시작은 차후 다양하게 계속될 연구의 단초가 될 것이고.


2010년 한길사 초대 하석 박원규 개인전 <字中天> 전시장 정경


2010년 한길사 초대 하석 박원규 개인전 <字中天> 전시장 정경


둘째, 평설이 활발하면 명작이 더 많이 탄생할 영감의 샘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작가들의 창작 세계가 넓고 깊어지리라. 평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창작의 보약이다. 상대를 인정하면 내가 성장한다는 것이야말로 말이 아니라 실천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평설로도 배우겠거니와 다른 사람의 작품을 평설하는 것 또한 얼마나 큰 공부인가. 능동적 섭취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배설을 하자.

동업자의식, 이거야말로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연예인들, 특히 개그맨들의 세계가 비교적 그런 것 같다. 분명 경쟁 구도일 것 같은데 협력한다. 상대방의 엉뚱한 면을 예능의 소재로 삼기도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 폄하라기보다 대중에게 재미를 제공하고, 세간의 이목을 집중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외적이겠지만 그들의 심각하지 않는 일상, 괜찮아 보인다. 물론 일부 연예 기자들의 폭로성 기사는 별개다. JYP 대표 박진영이 소속사 아이돌 교육에서 동업자의식을 강조한 예다. 그는 “연예활동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천운이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동료 안 좋은 점을 입 밖에 내지 마라.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겸손해야 한다. 진심으로 겸손하면 동료도 스치는 사람도 모두가 고맙고 감사의 대상”이라 했다. 그렇다. 서예 작가 아무나 하는 것 아니다. 단순 직업인이 아니잖은가. 자기 울타리와 점잖은 것에서 벗어나자.


국당 조성주, 전각 구룡도, 가로 8m, 높이 3m, 총2톤의 黑珠石 전각석


국당 조성주 선생의 동화사 전각벽화 <一心觀佛> 앞에서 필자


책과 영상의 효과

평설 또는 평전은 평론과 전기의 합체이다. 미국의 링컨 전 대통령 사후 180권의 평전이 출간되었음은 평전이 암시하는 넓고 깊은 세계다. 일반적인 자서나 작품 평론에서 소화할 수 없는 대목들도 평전에서는 선연히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 즉 자기 입으로는 증언하기 어려운 감동적인 부분은 제3자가 쓰는 평설로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다. 하니 기왕이면 작가 생존시 한 편이라도 풀어내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더 낫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가 더 좋지 않으랴.

필자가 기록적인 창작품을 먼저 꼽은 이유, 그 안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일관성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는 것,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가는 것은 뭔가를 이루는 바탕이다. 희망의 끈이다. 기록적인 창작은 온갖 부적합한 현실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했다는 증거다. 반전이랄까? 진지함도 있고 그만의 해학도 스며있다. 투철함 안에 감춰진 드러내지 않은 즐김을 찾아내 널리 알리는 것이 평설의 본질이다.

누구에게나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미래는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세상에 판타지가 존재하고 또 필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평설은 막히고 답답한 길을 뚫는 일이다. 위대한 작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기가 필요한데, 평설은 분명 좋은 계시가 될 수 있다.

기록적인 창작물들, 이것은 개인에 의한 것이지만 시대가 창출한 역사적 유산이다. 개인에 의한 것이지만 모두가 함께 공유하며 아끼고 드러내야 할 공동의 자랑거리다. 특히 기록적인 창작물들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감동이고 기도이며 힐링이다.


국당 조성주, 불광(3), 96×280cm, 10×10×2.5cm 석인재 224편


국당 조성주, 금강경 전문 5,440자 완각, 實印數 1,151방, 1997년 한국 기네스북 등재


예로 들어본 평설의 대상

본고의 이해를 위해 필자는 단 두 분의 작가와 그 분들의 특성이 뚜렷한 족적을 예로 들겠다.

우선 하석 박원규 선생이시다. 그가 계획하고 실천하며 밝혀내는 작가임은 서단이 주지하는 바다. 선생을 통해 후학들이 배워야 할 점 많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25년을 계속한 주제를 통한 연작과 작품집 발간이다. 1985년에 펴낸 『마왕퇴백서노자임본』은 하버드대학교 관계자가 수소문하여 도서관에 소장했을 정도의 문헌적 가치를 자랑한다. 2010년 대담집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와 최근 다시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를 한길사가 발행했다. 선생의 존재감은 많은 숫자의 책들뿐만이 아니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선생만의 획기적인 기획전시를 빼놓을 수 없다. 때마다 권위의 수상들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예술과 인생에 관한 총체적인 평설, 꼭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대의 작가군을 위해서다. 사표로 삼을 많은 후학들을 위해서다. 타 장르의 작가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도 서예와 서예스타의 진면목으로 색다른 감동을 경험하게 되리라.


다음은 국당 조성주 작가의 전각작품이다. 제기동 법화정사와 대구 동화사에 소장된 거대 작품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 최근엔 전각 구룡도전 <九龍이 나르샤, 君子 행하샤>로 그의 존재감을 더 높였다. 필자는 2015년과 2016년 법화정사와 동화사 두 곳을 방문하여 그 작품들을 일별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으로 이루어진 그 방대함에 누구라서 감동, 감탄하지 않으랴. <전각 금강경>이 기네스 등재된 것으로나 법화정사에 영구 소장된 <전각 법화경>이 한국기록원에 등재된 것을 획기적인 일로만 여기고 지나칠 일이 아니란 의미다. <전각 구룡도> 작품 또한 제작 기간이 무려 7년여라고 한다. 2톤 가량의 무게와 1억5천만 원의 전각석 비용도 아무나 감당하지 못할 크기다. 건강 악화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마다 그는 사명감과 서단을 향한 희망으로 버텼다고 한다. 그의 의지로 일궈낸 작품들 그건 분명 이 시대 우리들의 보물이다.


마치며

한국서단의 작가들은 자기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낼까? 대표작으로 꼽을 작품이 얼마나 될까? 때마다 걸작을 창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두루 아는 바다. 최선을 다하지만 늘 좋을 수는 없으니 내 것이나 남의 것이나 못난 것부터 들추지 말자. 칭찬만 하려도 모자란 세상, 좋은 것만 들춰 그것을 전부로 삼자. 작고 작가에서 원로와 중진, 청년 작가에 이르기까지 한국서단엔 훌륭한 작가가 참 많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 스스로 참다운 생산자가 되자. 신명난 이야기판을 펼치자.

대개의 철학자들은 “인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의미 없다.”라고 한다.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내 인생을 어떤 의미로 채워가지?’가 진짜 의미라는 거다. 자기 삶을 살라는 의미겠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들은 행복하다. 자기 낙관을 새길 자기 확신 넘치는 작품을 맘껏 창작할 신의 면허를 가졌으니.


※ 본고는 <자카르타 경제신문> 오피니언 전문가 칼럼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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