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지오그래픽’지(誌)에
첫 컬러 이미지로 등장한 관음백불
-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玉泉庵 磨崖菩薩坐像) 보물(지정일 2014. 3. 11)
김재필 (사진작가 · 필아트영상 대표)
미국 국립지리학회가 1888년 창간한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은 1910년부터 칼러 사진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1910년은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권이 상실된(8월 29일) ‘경술국치’의 해이다. 당시에 선교사 등 많은 서양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미국의 여행가이자 사진가인 월리엄 채핀이 서울여행에서 찍은 사진 중 백불로 된 ‘마애불’ 사진이 있었는데, 바로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바로 1910년 11월호 ‘내셔널지오그래픽’지에 칼라사진으로 게재하였다. 당시 사진을 보니 물이 흐르는 홍제천변의 보도각안에 백불로 보이는 마애보살좌상이 있으며, 그 앞엔 벙거지를 쓴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끌며 지나가고 있다.
아마 컬러사진으로 외국에 소개된 최초의 마애불 사진이라 할 수 있겠다. 구한말을 전후하여 서울에 왔던 서양인들에겐 우리나라의 풍경이나 사회상들이 신기하게만 느껴져 셔터를 눌렀으리라. 내가 라오스의 오지마을에서 우리나라 60년대의 생활상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생활상과 풍경을 담았듯이…….
조선후기 정조 연간에 수도 한성부의 생활상과 역사를 자세히 기록한 수헌거사는 저서 『한경지락』에서 ‘옥천암 마애불좌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 실린 1910년대의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의 전경
“창의문 밖 한북문 곁에 옥천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샘이 언덕 위 바위 사이에서 흘러 바람병, 체증 있는 사람이 마시면 신효하게 낫고 눈병에도 씻으면 낫는다고 한다. 옥천암의 불상은 언덕 바위를 깎아서 만들고 해수관음보살이라 한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상호
이번 호에는 조선후기 수헌거사의 『한경지락』에 소개되고, 구한말 한국을 방문한 월리암 채핀이 사진을 찍어 <내서널지오그래픽> 잡지에 소개했던 ‘옥천암 마애보살좌상((玉泉庵 磨崖菩薩坐像), 보물 1820호. 일명 관음백불, 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지문길 1-38)’을 소개한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은 홍제천(弘濟川)이 감아 돌아 나가는 바위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네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옥천암 앞에 흐르고 있는 홍제천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보도각(普渡閣)이라는 다리를 건너 홍제천변의 산책길로 조성한 나무데크를 따라갔다. 옥천암 좌측 아래에 있는 5m 정도 되는 바위에 높이 483cm, 무릎 폭 344cm 크기의 불상 전신에 흰색 호분으로 칠해져 있어 일명 ‘보도각(普渡閣) 백불’ 또는 ‘백의관음보살’로 불리는, 온화하지만 근엄한 자세의 마애보살좌상이 홍제천을 내려다보고 있다.
여기서 보도교(普渡橋), 보도각(普渡閣)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보도(普渡)라는 뜻이 무엇일까? 중국 해안 지역의 사찰에 가면 자항보도(慈航普渡)라고 쓴 글을 볼 수 있다. 자항보도(慈航普渡)란 ‘관음의 자비로운 도움으로 무사히 바다를 건너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보도’는 바로 ‘관음(觀音)’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곳 홍제천의 보도교도 물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이 담긴 다리가 아니겠나? 그건 나의 좁은 생각일 터, 광의(廣義)로 해석해 보면 바다나 강, 시내 등의 물을 건너간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고뇌에서 벗어난 자유와 영원한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옥천암과 보도각 안의 마애보살좌상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호(당시 이름 : 보도각 백불)에서 2014년에 보물 제1820호로 승격되면서 이름도 ‘마애보살좌상’으로 변경된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 후기(12세기~13세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면서 기도하러 온 이성계의 염원도 받아 주었을 것이고, 조선말에는 아들을 위해 축원하러 온 흥선대원군 부인(고종의 모친)도 만나는 등 삶의 세파로 심신(心身)이 주름진 많은 이들에게 살아가는 지혜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참배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살금살금 살펴보니 처음부터 흰옷을 입은 것은 아닐 터, 궁금하여 스님에게 여쭤보니 고종의 어머니인 민씨(閔氏)가 고종의 복을 비는 치성을 드리며 불상에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빻아서 만든 가루)을 발라 한때는 ‘백의관음’으로 불렸으며, 보도각도 그 시대에 지어졌다 한다. 그 말이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구한말에 우리나라를 찾았던 서양인들의 기록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구한말 이 땅을 찾은 외국인들의 여행기에는 ‘하얀 부처’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 여성 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는 서울 여행기에서 이곳의 ‘마애불좌상’을 ‘하얀 부처’라는 이름의 그림을 남겼다.
장마가 지나간 홍제천은 전에 없이 넘실대며 세차게 흐르고 있다. 참배객이 많은 걸 보니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양양 낙산사, 인천 강화 보문사, 경남 남해 보리암)와 같이 영험이 있나 보다. 한참을 기다려 참배객들이 모두 자리를 뜬 후 앞에 바짝 다가가 올려다보니 다른 관세음보살처럼 정병을 들지 않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손바닥을 보이면서 아름답게 구부리고 있는데, 가운데 손가락 중지의 곡선미와 나머지 약지, 새끼손가락의 차이를 두고 구부러진 섬세한 손 표현이 두드러진다. 양 손목에는 굵고 둥근 팔찌를 끼고 있으며, 허리가 비교적 잘록하게 되어있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전통을 잇고 있다. 머리엔 아미타보다 더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중앙부에 큼직한 꽃무늬가 있고, 꽃무늬의 중앙에는 4개의 꽃술이, 그 주위로 20여 개의 작은 꽃잎이 둥글게 새겨져 있다. 높고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은 일반적인 관음보살의 것에 비해 형태가 다른 위엄과 권위, 그리고 벼슬에 따른 신분의 상징으로 보이는 황제의 관에 버금간다. 따라서 불교에서 일컫는 불교 십이천의 하나인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는 우리나라에서의 제석천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으로 기술하고 있다. 환인은 불경의 제석환인에서 따온 이름으로, 베다신화(Veda神話)에서 제일 유력한 신으로서 인드라신(Indra 神)을 말한다. 인드라신은 불교가 성립된 뒤, 범천(梵天)과 함께 불법의 수호신으로 그 기능이 변모되었으며, 동방(東方)을 지키는 신, 즉 수미산(須彌山, Sumeru) 정상에 거주하며 도리천(忉利天, Trayastrimsa)을 주재하는 임금이다.1)
마애불이 조성되기 전에 이곳은 제천사상과 바위숭배의 신앙이 혼재되어 있다가 불교가 전래되어 관음보살과 환인의 모습을 오버랩 형식으로 새겨놓은 것이 아닐까?
임진왜란 때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앞에서 일어난 전투의 일화가 생각난다.
“여기서 더 이상 밀리면 안 된다. 반드시 이곳에서 왜군을 격퇴시켜야 한다.” 군령이 떨어진 조선군은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야간매복에 들어갔다. 아주 작은 병력이지만 옥천암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둔 조선군과 왜군은 상대방의 군사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처음 이 지역으로 들어온 왜군들은 순간 동요하기 시작했다. 옥천암 마애부처님을 조선의 장군으로 오인하면서 갑자기 탄약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왜군들이 탄환을 쏘기 시작한다. 모두들 매복하라.” 쉼 없이 날아드는 왜군의 탄환은 이내 바닥이 났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탄환이 바닥난 왜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기 강 건너편에 커다랗게 흰옷을 입은 조선장수가 있는 듯하여 일제히 발포명령을 내렸는데 다시 보니 돌부처였구나. 이거 큰일났다. 빨리 퇴각해야겠구나.” 허겁지겁 퇴각하던 왜군들은 권율 장군의 반격에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앞에 흐르는 홍제천의 물소리에서 시대별로 일어나는 역사의 숨소리를 들으며 몇백 년 동안 좌정하고 있는 ‘마애불좌상’이 조성된 당시엔 옥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아름다운 골짜기로 수려한 경관을 갖추었겠지만 지금은 무분별한 개발과 보도각 앞의 내부순환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의 소음과 매연으로 인해 밤엔들 어찌 잠을 제대로 이루겠나 싶은 생각에 내 마음 또한 가볍지 않았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환인(桓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