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창석 김창동 고희전 (菖石 金昌東 古稀展)
  • 이용진 기자
  • 등록 2016-09-27 10:57:47
기사수정
  • 2016. 9. 28 ~ 10. 4 세종미술관 1관

창석 김창동(菖石 金昌東) 선생이 고희전을 연다. 2006년 9월 조선일보 미술관에서의 회갑전 이후 10년 만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오체에 걸쳐 400여 점을 선보인다. 예서, 행서, 초서에 중점을 뒀다. 창석 선생은 전시를 앞두고 “40대부터 쉬지 않고 열심히 작품을 준비해 왔다”면서 “그러나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했듯이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동안 전시회에 작품을 보러 온 관람객들의 말을 많이 듣고 그러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해 이번 전시회를 진행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명산, 명찰 등 명소 50군데서 작품 500여 점을 창작하다


창석 선생은 10년 전부터 고희전을 준비했다.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연 회갑전 직후부터이다. 문방사우를 짊어지고 지리산 천왕봉, 태백산, 월출산, 합천 해인사, 인천 장봉도 등명산(名山), 명찰(名刹), 명소(名所) 50여 군데를 찾아 글씨를 썼다.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이 좋다”는 생각하에 오직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한 일념으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돌아다니면서 작품을 한 것이다. 


그곳에서 한 500여 점의 작품 가운데 골랐다. 이처럼 자연과 벗하는 선생의 작품은 ‘천연스러운 분위기와 자연스러운 운필’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즉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그러다가 마음을 놓은 듯 치닫는다. 원필이면서도 골기가 있고, 유려하면서도 기세가 내재돼 있다. 선생이 글씨, 특히 예서와 행초는 기(氣)와 운(韻)을 엮어 자연스러움과 유가적 사유를 내함했다.



또한 지금까지 중국, 일본 등과의 교류전, ‘근역서가회전’ 등 국내의 단체전, 초대전 등에 출품했던 50여 점의 작품을 더했다.


이에 ‘금강경’, 노자 ‘도덕경’, 소동파 ‘적벽부’, 도연명 ‘귀거래사’ 등 병풍 20벌도 전시한다. 또한 14대 선조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비문을 비롯한 비문 20여 점, 내설악 백담사 일주문 현판 등 사찰, 향교, 서원 등의 현판 40여 점을 탁본하고 사진을 촬영해 작품집에 부록으로 수록했다.


창석 선생은 10년 전부터 부친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 선생이 강학하던 전남 구례의 서당을 수리해 그곳에서 작품을 해오고 있는데, 별도로 국내의 명소를 찾아 대략 닷새 정도 머물며 작품을 한다. 하루에 세 번 정도 쓰는데, 새벽, 한낮, 한밤에 쓴다. 


그렇게 작품을 하면서 때를 바꿔 검토해보기도 하고, 한데 모아서 살펴보기도 한다. “해인사 근처의 개인 집을 5일간 빌려서 작품을 했는데, 경치가 좋고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자연스러운 작품이 되었습니다. 또 지리산 천왕봉은 스무 번 정도 등정하였는데, 장터목산장에서 세 차례에 걸쳐 작품을 했습니다. 특히 선고(先考) 고당 선생이 천왕봉에서 지은 시를 직접 쓰기도 하여 의미가 컸지요.한 번은 인천 장봉도 별장에 머물면서 글씨를 썼는데, ‘禪茶’, 명도(明道) 선생 ‘추일우성(秋日偶成)’ 등의 작품입니다. 석양 빛에 바다를 바라보면서 5일간 한 작품을 보니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역시 경치가 좋고 공기도 맑고 마음도 맑아서 그런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해 가을에는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에 올랐다. 추석날에《주역》의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두 사람이 같은 마음이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를 수 있고, 진정한 마음에서 하는 말은 그 냄새가 난초같이 향기롭다.)” 구절로 글씨를 썼다. 


이 작품을 ‘근역서가회전’에 출품했는데, 많은 이들로부터 ‘활발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고희가 되어 ‘천자문’을 쓰다 


이번 창석 선생의 고희전에서 주목해야 할 점 가운데 한 가지는 천자문(千字文)을 출간한 것이다.


‘초서천자문’, ‘예서천자문’ 등 2종의 천자문을 출간했다. “천자문은 내 공부가 될 겸 하여 고희를 기해 출간”하게 됐다고 하는 창석 선생은 진즉부터 천자문을 책으로 펴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부친 고당 김규태 선생은 “글씨는 어느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책을 만들든지 글을 내보이든지 70살은 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받들어 천자문을 책으로 엮는 것을 늦추었던 것이다. 이번에 비로소 두 가지 서체의 천자문을 써서 출간하게 됐다.


천자문은 여러 서가들이 여러 서체로 썼고, 집자(集字)로도 천자문을 엮은 것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서예가들이 천자문을 써서 출간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예서와 초서로 천자문을 출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공부’에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천자문에 얹어보고 싶은 마음과 천자문을 쓰면서 다시 깊이 살피고자 한 것이리라. ‘예서천자문’은 ‘석문송’(石門頌), ‘예기비’(禮器碑), ‘장천비’(張遷碑), ‘을영비’(乙瑛碑), ‘조전비’(曹全碑), ‘사신비’(史晨碑) 등을 바탕으로 창석 선생 예서 필의가 잘 드러난다.


‘초서천자문’은 장욱, 회소, 소식, 황정견, 미불, 유석암, 손과정 등을 바탕으로 이룬 필획의 활삽(滑澀), 대소, 지속(遲速), 곡직(曲直), 태세(太細), 소밀(疎密) 등의 변화를 선생의 필의로 담아냈다.





좋은 작품 재료는 용을 잡는 그물이다


창석 선생의 높은 ‘한학’(漢學) 실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훤당 김굉필의 14대손이기도 한 창석 선생은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지는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 선생으로부터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컬어지는 노백 헌정재규 (老栢軒 鄭載圭,1843~1910), 항일(抗日)의 유학자 율계 정기(栗溪 鄭琦, 1879~1950), 호남의 마지막 유학자로 평가받는 고당 김규태 선생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맥을 받았다.


그런데도 선생은 여전히 학문의 부족함과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글은 글씨에 스미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고당 선생의 가르침이기도 했지만 서예를 하면서 점점 더 학문의 중요성을 실감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작을 대별해보면 격언 작품 200여 점, 자연을 읊은 작품 200여 점으로 나눌 수 있다. 창석 선생은 ‘인생의 좌우명’이 되는 글씨를 쓰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고 했다. 무게 있는 글, 가정과 국가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자 했던 것이다.


창석 선생은 일찍이 광주의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서울로 와서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창석 선생은 서울에 오면서 물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자료의 부족을 실감하던 선생에게 서울은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데 더 없이 좋았다.



중국, 일본 등을 오 갈 때면 일부러 고찰을 찾아가 잘 쓴 현판을 일일이 사진을 찍어서 자료로 보관하였다. 중국만해도 100여 군데의 사찰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으로 자료 사진첩 서너 권을 정리해두었을 정도이다.


또한 대만 고궁박물관, 중국 요녕성박물관 등에서 우연히 명작을 만날 때마다 마른 땅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가슴 속에 작품을 고스란히 담아 왔다. 좋은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샀다.


창석 선생은 서예 재료를 특히 중시한다. 글씨는 문방사우가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떨어진 옷을 입을지 언정, 붓, 벼루, 먹, 종이는 정말로 질이 좋은 것을 써야만 참다운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다.


그런 생각은 서예 재료를 구입하는 데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100가지의 좋은 종이, 1,000자루의 좋은 붓, 1천만 원이 넘는 벼루 5개를 비롯하여 180개의 벼루, 한 개에 500만원, 300만원, 200만원씩 하는 청나라 먹, 고매원 먹, 오죽당 먹 등 50여 종류의 좋은 먹을 소장하고 있다. 


한 번은 중국 영보재에 갔더니 특이한 종이가 있었는데, 한 장에 35만원, 20만원씩 하였다. 그렇게 구입한 재료들로 한 작품들이 이번에 전시된다.


특히 이번 전시작을 위해 문화재급의 ‘필장’(筆匠) 세 명에게 특별히 의뢰하여 최고의 털로 100여 자루의 붓을엮어 작품을 했다. “재료란 그물과도 같습니다. 용을잡고 나면 그물이 필요 없어집니다만, 용을 잡기 위한 것이라면 당연히 좋은 작품 재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조화를 부르는 데도 저울 눈 하나를 다툰다’고 했고, 만안(萬眼)보다 일안(一眼)을 무서워해야 한다고 했다. 오묘한 맛, 오묘한 경지의 글씨는 어렵다. 일생에 맛있는 글씨를 한 점만 쓰고 떠나도천추에 남는다고 했는데, 창석 선생이 좋은 재료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은 맛있는 글씨를 써보고자 하는 뜻에 있는 것이다.





인생과 작품에 대전환을 이루다


창석 선생은 지난 해 큰 수술을 했다. 수술이 잘 되고, 이후 치료도 잘 되어서 지금은 건강을 많이 회복하였다. 


수술 이후 술은 입에 대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정밀도가 높아졌다. 글씨가 더 담백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수술 이후 작품을 200여 점을 했을 정도이다.


선생에게 있어서 지난 해 겪었던 고통의 경험은 마음과 작품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고인들의 격언을 거울삼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而不溫)”는 글귀를 좌우명을 삼고, 겸손과 내적 수양에 좀 더 마음을 기울이고자 하였다.


눈, 비, 바람 속에서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큰 수술을 하고 난 후 더욱더 겸손하고 규칙적인 생각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쓰라린 고통은 선생에게 공부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글씨가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기해서 앞으로 여생 동안 새로 공부하는 기분으로 왕희지, 안진경, 회소, 장욱, 예기비, 장천비, 석문송 등 고인들의 작품을 다시 의임하려고 합니다. ‘논어’를 다시 읽을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번 전시의 작품집에는 성명, 아호, 당호, 좌우명 등 최고의 전각가에게서 받은 전각 100여 방도 단 하나의 누락 없이 모두 수록했다. 


창석 선생의 작품과 어우러지는 전각을 아울러 감상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창석 김창동 선생은 한국 서예계의 대가로,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심사위원장,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자문위원, 국제서법연맹 공동회장이다.


※ 문의 : 010-8650-2388 (창석 김창동)


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