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군 대흥사(大興寺)의 〈호국대전護國大殿 편액扁額〉은 마하(摩河) 선주선(善柱善, 1953년생) 원광대학교 명예교수가 2024년 정월에 쓴 것이다. 편액 뒷면에 “갑진 양력 정월에 선주선 삼가 쓰다”〔甲辰陽正月 宣柱善謹書〕라고 새겼다. 요즘 사찰의 편액과 주련에 쓴 사람의 성명과 인장을 앞면에 새기는 일이 잦은데, 이러한 관습을 피하려는 선주선 교수의 뜻이다. 글씨 모각(摹刻)은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송전 정진웅이 시행했는데,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이던 철재(鐵齋) 오옥진(吳玉鎭, 1935~2014)의 수제자이다.
▲ 마하 선주선 교수, 2023년
마하 선주선 교수는 경기도 파주 출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한 뒤 대만 중국문화대학 예술연구소에서 청나라 조지겸(趙之謙)의 서예와 전각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문집에 나타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불교사상’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찍이 부친에게 서예를 배웠고, 중학교 때 백석(白石) 김진화(金振和) 선생에게 배웠으며, 고등학교 때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 선생에게 전각(篆刻)을 배웠다. 동국대학교 입학 이후로는 시암(時庵) 배길기(裵吉基) 선생에게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훈도를 받았고, 월당(月堂) 홍진표(洪震杓) 선생에게 한문과 서예이론을 익혔다. 개인전 11회 개최를 비롯하여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전,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등에 출품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한편 1990~2018년 원광대학교 서예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을 널리 양성하였다.
〈호국대전 편액〉은 평정한 짜임에 굵은 획법을 써서 편액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데, 그 바탕은 당(唐)나라 명신 안진경(顏真卿, 709~784)의 글씨에 두었다. 안진경은 755년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반란 즉 ‘안사의 난(安史之亂)’ 때 하북(河北) 지역의 의용군을 이끌고 반군에 맞서 단번에 하북을 회복시킨 뒤 헌부상서(憲部尙書:형조판서)에 제수되었고, 대종(代宗, 재위 762~779) 때 이부상서(吏部尙書:이조판서)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었고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져 ‘안노공(颜魯公)’으로 불렸는데, 강직한 성품으로 그 명성이 조정에 자자했다. 그 뒤 덕종(德宗) 때인 784년(興元 1) 서북쪽 번진(藩鎭)의 장수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킴에 조정의 명으로 그를 효유(曉諭:알아듣게 타이름)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자신을 억류한 이희열에 맞서 꿋꿋이 충정을 지키다가 끝내 목 졸려 피살되었다. 이에 조왕(曹王) 이고(李皋, 733~792)를 비롯한 왕실과 삼군(三軍) 장사들이 그의 독실순후(篤實純厚)한 정의(正義)를 받들며 애도하였고, 조정에서는 그를 사도(司徒)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謚號)를 내렸다.
안진경은 정자체인 해서(楷書)와 흘림체인 행서(行書)에 뛰어났다. 외조부 은씨(殷氏)를 비롯하여 장욱(張旭)의 영향을 받았고 채옹(蔡邕)ㆍ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ㆍ저수량(褚遂良) 등의 글씨를 두루 익혀 웅위강경(雄偉剛勁)하고 대기방박(大氣磅礴:기세가 큼직함)한 특유의 풍격을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수많은 계승자ㆍ추종자를 낳았고 특히 오대~북송 때 문인ㆍ명사들 사이에서 애호되면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12세기부터 탄연(坦然) 등에 의해 유행되었고 조선시대에는 17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이후 확산되었으며 특히 해서는 비문으로 자주 집자(集字)되었다.
▲ 안진경 씀, 〈다보탑비〉(千福寺多寶佛塔感應碑文), 752년(唐 玄宗 天寶 11), 搨帖, 일본 개인
안진경의 필적으로 〈다보탑비〉ㆍ〈대당중흥송〉ㆍ〈안씨가묘비〉 등의 여러 석문과 〈제질문고〉 묵적 등이 유명하다. 〈다보탑비 多寶塔碑〉(752년, 44세)는 장안 용흥사(龍興寺) 초금선사(楚金禪師)가 창건한 다보탑의 내력과 수건(修建) 과정을 적은 것으로 수미강경(秀美剛勁)한 서풍을 보여 안진경 해서의 표준이 되었다. 〈대당중흥송 大唐中興頌〉(761년, 52세)은 안사의 난을 겪은 뒤 당(唐) 왕조의 중흥을 염원하는 뜻에서 당시 중신이던 원결(元結)이 짓고 안진경이 대자로 써서 호남성 오계(浯溪)의 벼랑에 새겼는데, 자획이 방정하고 근골(筋骨)이 드러나지 않아 웅위특기(雄偉奇特)한 서풍을 보인다. 〈안씨가묘비 顔氏家廟碑〉(780년, 71세)는 북제(北齊)의 저명한 학자인 5대조 안지추(顏之推)로부터 부친 안유정(顔惟貞)에 이르는 선조들의 벼슬 경력과 치학(治學)ㆍ경세(經世)의 정황 등을 안진경이 짓고 써서 집안 사당에 세운 것으로 짜임이 너그럽고 골력이 굳세며 기개가 꿋꿋하여 안진경 노년의 질박중후(質樸重厚)한 서풍을 대표한다.
▲ 안진경, 〈제질문고〉 부분, 765년(唐 肅宗 乾元 1), 紙本, 28.3×75.5cm, 卷粧, 타이뻬이 국립고궁박물원
다음 행서로 쓴 〈제질문고 祭侄文稿〉(758년, 49세)는 안진경이 형 상산태수(常山太守) 안고경(颜杲卿, 692~756)과 조카 안계명(顔季明, ?~756)이 안록산의 난 때 분연히 나아가 적군과 맞서다가 “아비는 함락되고 아들이 사망하니 둥지가 기울고 알이 엎어졌다.”〔父陷子死 巢倾卵覆〕면서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제문의 원고이다. 특히 “너의 몸이 이렇게 잔해(殘骸)가 되었음을 생각하니 일백의 몸으로도 어찌 너의 진신(眞身)을 되돌리겠는가. 아아 슬프다.”〔念爾遘殘 百身何贖 嗚呼哀哉〕라는 구절에서 끊어질 듯한 아픔이 짐작된다. 비분강개한 심정이 북받쳤을 것이고 글씨의 공졸(工拙)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평소의 필력이 그대로 드러나기에 기세가 큼직하고 용필이 호방하다. 일찍이 북송 소식(蘇軾, 1037~1101)은 “시는 두자미(두보)에서 지극하고 문은 한퇴지(한유)에서 지극하며, 그림은 오도자에서 지극하고 글씨는 안노공에서 지극하니, 고금의 변화와 천하의 능사를 다하였다”〔詩至於杜子美, 文至於韓退之, 畵至於吴道子, 書至於顔魯公, 而古今之變, 天下之能事, 盡矣.〕고 찬미하였다. 그래서 〈제질문고〉는 왕희지의 〈난정서 蘭亭叙〉, 소식의 〈황주한식첩 黃州寒食帖〉과 함께 ‘천하의 삼대 행서’로 칭송되었다.
▲ 선주선, 〈대흥사 호국대전 편액〉, 2024년 1월 씀
▲ 안진경의 〈대당중흥송〉(761)으로 집자해 본 ‘誰國大殿’
▲ 안진경의 〈안씨가묘비〉(780)로 집자해 본 ‘護國大殿’
선주선 교수의 〈호국대전 편액〉은 이러한 안진경의 노년 서풍에 바탕을 두면서도 글자를 보다 평정하게 하여 안정세를 취하고, 점획을 보다 두툼하게 하여 편액 글씨의 체격을 이루었다. 특히 안진경 해서의 특징인 제비꼬리〔燕尾〕 모양의 파임〔波〕이나 강한 형세의 갈고리〔鉤〕를 순후질직(純厚質直)한 획으로 처리하였다. 마치 어린 동자가 쓴 듯 어떤 기교도 없이 어리숙한데, 이는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71세 말년에 쓴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의 〈판전 편액〉의 고졸(古拙)한 풍격에 가깝다. 공교롭게도 〈호국대전 편액〉을 쓴 2024년은 선주선 교수 71세였다.
▲ 김정희, 〈봉은사 판전板殿 편액〉, 1856년(철종 7) 씀, 搨本, 73×213cm, 한상봉 소장
이처럼 대흥사의 〈호국대전 편액〉 글씨는 만고충절(萬古忠節)과 천추의열(千秋義烈)의 상징적 인물인 안진경의 서풍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 각별한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번 낙성된 대흥사 호국대전은 조선시대 의승(義僧)을 기리는 추념 시설로 시작하여 향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등 국가의 위난(危難) 때마다 분연히 일어났던 영령들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의 정신을 기림으로써 우리나라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을 계승하는 역사교육의 성소(聖所)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대흥사에는 이미 1788년(정조 11) 천묵(天黙)ㆍ계홍(戒洪) 등의 스님이 발의로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당(清虛堂) 휴정(休靜 1520~1604)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 사명대사(四溟大師) 송운당(松雲堂) 유정(惟政)과 유정의 제자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의 영정을 모실 사우(祠宇)의 건립을 모색한 바 있고, 그 소식을 접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 서산대사 사적과 사우 건립의 당위성을 정조 임금에게 주청하여 건립 허가와 함께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賜額)을 받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 대흥사 호국대전은 기존에 세워진 문수전(文殊殿)ㆍ보현전(普賢殿)과 더불어 장차 우리나라 호국 영령들의 정신을 발양(發揚)하는 호국불교의 중심처로서 표충사의 전통을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