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고졸한 미소를 띄고 있는
불곡(佛谷)의 선정인(禪靜人)
- 경주 불곡 감실 마애여래좌상(보물 제198호)
김재필 (사진작가 · 필아트영상 대표)
온갖 사물은 순간순간 변한다.
한순간도 머무는 것이 없다.
그것은 마치 꽃잎에 매달린 이슬과 같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으며
모래로 쌓은 담과 같다.
- <보문경> 중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바위신앙과 삼국시대에 유입된 불교와의 습합(習合)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마애불이다. 마애불이란 절벽의 바위 면이나 거대한 바위 면에 선각이나 돋을새김 기법으로 불상이나 보살상 들을 새긴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마애불은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근엄한 모습으로, 또는 어머니와 같은 푸근하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아니면 천상에서 막 내려와 속세의 대중을 향한 익살스런 모습 등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캔버스인 암벽에 서로 다른 미적 감각을 가진 석공들의 망치와 정 끝에서 출발한 종교적, 예술적 아우라는 볼수록 은근하고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내가 처음 마애불을 처음 접하게 된 때는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불심이 깊으셨던 어머니를 따라 어느 사찰에 갔을 때 커다란 바위면에 새겨진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잊고 있었다가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0여 년 전에 문화재 촬영차 신라의 옛 수도 서라벌이었던 경주 남산에 갔을 때였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 된 것은 눌지왕(訥祗王, 411~457) 때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 일명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리) 모례(毛禮)의 집에 기거하면서 낮에는 일을 하여 도움을 주고, 밤에는 사람을 모아 자비로운 불법을 전하였으나 당시 신라는 외래 문물(종교)에 배타적이라서 불교를 박해하여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불교를 믿을 수 없었다. 법흥왕(法興王)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다음 해에 국교로 공인되어 급속하게 전파되어 국교로까지 굳혀져 정치적으로는 ‘호국불교’로, 문화적으론 ‘불교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따라서 로마가 ‘서양의 야외 박물관’이라면 길이 약8km, 폭 약4km의 산줄기에 불상 80여 채, 탑 80여 기, 절터 110여 개소의 불국토를 아룬 남산을 품고 있는 경주 역시 ‘동양의 야외 박물관’이라 할 만큼 문화재의 보고(寶庫)로, 유네스코는 2000년에 석굴암 등 경주 역사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바위 깊숙이 감실을 파고 마애여래좌상을 조성했다
삼릉계곡을 갔다 오면서 마애불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다가 지인에게서 근처에 ‘할매부처’가 있다는 말에 그곳을 안내 받아 <불곡 감실 마애여래좌상>을 찾아가 보았다.
유적이 있을 만한 장소로 보이지 않는 야트막한 버덩에 양옆으로 산죽이 자라고 있는 대나무 터널을 지나 10여 분을 올라가니 시야가 넓어지면서 바위가 보인다. 평평한 곳에 높이 3.2m, 넓이 4.5m 정도 되는 바위에 1.42m의 크기로 홍예형(虹霓形)으로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앉아 있는 부처를 조성해 놓았다. 머리와 상반신이 매우 입체적으로 부조된 반면, 하반신과 옷주름 등의 세부표현은 선각(線刻)에 가까운 얕은 새김(低浮彫)으로 묘사되었다.
두건을 쓴 것 같은 머리는 귀를 덮고 어깨까지 내려오고 육계는 낮게 표현되어 있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방형에 가까운 후덕하게 생긴 얼굴에 이마와 턱을 좁게 표현하였고, 광대에서 뺨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다소 갸름하게 표현하였다. 이목구비는 대체로 얕은 새김으로 표현하였는데, 눈썹과 미간에서 콧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윤곽선을 깊게 파서 두 뺨의 양감을 강조하여 얼굴 전체에 입체감을 부여하였다. 두툼한 입술은 양 입꼬리를 살짝 올려 아르카이크한, 그러나 신비함보다 소박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옷은 통견으로 어깨에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수직으로 내려와 대죄를 덮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수인(手印) 대신 손은 소매 속으로 감춰져진 선정인으로 발은 앞코가 곡선을 그린 버선모양의 여래좌상에서 발은 일반적인 불좌상의 경우 발을 드러내지 않거나 발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표현하고 있으나, 이 불상의 경우 오른발만 밖으로 크게 부자연스럽게 드러내어 앞코가 곡선을 그리며 살짝 올라간 모양이 버선을 신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는 나중에 답사했던 <신선사 마애불상군 북암 공양자상(供養者像)>에서 이와 같은 버선코 모양을 볼 수 있다.
천여년 전 부처의 이 골짜기를 공간의 씨줄로, 손끝에서 전해오는 전율을 시간의 날줄로 하여 자연공간을 종교공간으로 짜 놓은 신라의 석공은 바위를 쪼아서 만든 게 아니라 바위 속의 부처를 밖으로 모셔냈던 것이리라. 따라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편안해지는 것은 오랜 옛적부터 이어진 신라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유전적 정보가 세월을 거슬러 오늘의 우리에게 이어졌음이 아니겠나?
평소 감실 지붕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얼굴은 동짓날 아침에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이 마애불은 ‘할매부처’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을까?
여타 마애불들은 대개 사바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등성이 높은 곳에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 마애불은 작은 고을 언덕의 바위에 조성한 걸 보니 왕실이나 고관들이 참배하는 큰 마애불을 친견할 수 없어 이곳 마을 사람들이 이 조성하여 위안처를 마련한 것 같다. 따라서 마애불의 모습이 부처와 할머니의 얼굴이 동시에 오버랩된 것으로 보이기에 삼신할매를 연상시켜 ‘할매부처’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가 보기엔 할머니보다는 중년 여성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아마 지금보다 수명이 짧았던 그 당시엔 이 모습이 할머니로 보였던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닌가?
민초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팍팍하고 근심거리가 많다. 감실에서 선정 자세로 앉아있는 모습에서 집안의 평안을, 전장으로 나간 아들의 건강과 전승을, 멀리 일하러 나간 남편의 무사함을 기원했을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 마애불이 장창골 애기부처, 배리부처와 함께 조성된 시기가 7세기 전반으로 추정하는 학계의 의견으로 보아 그때는 무속 바위신앙과 불교신앙이 혼재했던 신크레티즘(synkrētism), 즉 혼효신앙(混淆信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작은 기쁨이 배어 있는 듯, 애잔한 슬픔에 젖어 있는 듯한 얼굴에서 슬픔은 슬픔이 아니고, 기쁨은 기쁨이 아닌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무한의 표정이다. 천년의 고졸한 미소로 다가오는 감실의 마애불은 깊숙이 들어앉아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표정을 한 선정인의 불상은 1959년 서울 성동구 뚝섬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초기 고구려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5cm의 <금동여래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있다.
한참을 바라보며 잠시 쉬고 있는데 노인 한 분이 올라오신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시곤 마애불에 대한 얘기를 해 주시는데, 그 중에서 마애불에 얽힌 전설이 귀를 귀울이게 한다. 믿기거나 말거나 전설은 항상 흥미와 대상에 대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신라 32대 효소왕 5년에 왕이 어느 날 남산에 있는 절의 축성식에 참석하여 공양을 올렸다. 그때 누추한 차림의 한 승려가 의식에 참석시켜 달라고 간청하여 왕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맨 끝에 서 있도록 하였다.
의식이 끝난 후 왕은 그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소승은 남산 비파암에서 왔습니다.”
왕은 조소를 띄우며 “돌아가거든 누구에게도 내가 임석한 의식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니 “명심하겠습니다. 폐하께서도 환궁하시면 어느 누구에게도 진신석가를 공양하신 걸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려의 등 뒤에서 광배의 형상한 금빛이 발하더니 땅 위에서 스며 오르는 구름을 타고 비파암 쪽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에 놀란 왕은 급히 친위대를 시켜 따라가 봤더니 비파암 언저리에 가사와 지팡이를 버리고 바위 속으로 사라졌다.
왕은 승려를 홀대한 죄를 뉘우치며 바위 근처에 절을 짓고 그 바위에 불상을 조성하라고 명했는데, 그 불상이 이곳의 마애불이라 한다.
말을 마친 어른은 “이 전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 하시며 으쓱해 했다. 그 분의 말을 듣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이 그때의 절터였는지 주위에 깨진 기왓장이 몇 개 보인다.
가부좌한 오른발은 뭉툭한 버선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마애불이 향한 방위는 석굴암의 불상과 같이 동동남 30도이며, 깊숙이 앉아 있어 얼굴은 항상 그늘 속에 있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동짓날 전후인데 동지(冬至)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로서, 태양 황경이 270도가 되는 때로, 해의 고도가 가장 낮아 감실에 앉아 있는 마애불의 이마까지 해가 비치기 때문이다. 동지의 음기는 햇살을 받음으로 해서 다시 양기로 변한다. 따라서 한 해의 마지막이자 일 년의 시작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이때 마애불에게 한 해의 평안을 빌었을 것이다.
※ 이번호부터 김재필 선생의 <마애불과의 만남>을 연재합니다. 우리 문화재의 깊은 아름다움과 예술적 묘미를 찾아온 필자는 사진작가이자 필아트영상 대표이며, 오랫동안 문화재와 서예계 행사를 촬영해오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