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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 최용준 고희서전 겸 실인 삼희 송화영 동행전
  • 이용진 기자
  • 등록 2016-10-10 15:29:19
  • 수정 2016-10-11 10: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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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10. 12 ~ 10. 18 인사동 한국미술관

하림 최용준 선생이 고희전을 겸해 부인(夫人) 삼희 송화영 선생과 동행 전시를 갖는다.


이번 전시는 하림 선생의 첫 전시회다. 지난 해 고희를 맞아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었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서 올해 열게됐다.




이번 전시는 고희전이기도 하지만, 부인 삼희 송화영 선생의 서예 작품도 포함해 전시한다. 하림 선생만의 단독 전시로 개최하려 했던 것이 ‘하림 최용준 고희기념 겸 실인 삼인 송하영 동행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하림 선생의 작품 230여 점, 삼희 선생의 작품 30여 점이 된다. 하림 선생은 이번 전시를 위해 1년여의 시간을 준비했다. 대작은 기존에 했던 것을 중심으로 선했으며, 소품은 근래 많이 했다. 서체별로는 5체를 고루 했으며, 특히 예서에 비중을 많이뒀다.


대작은 초서 작품이 많고, 소품은 예서, 전서가 많은 편이다. 병풍도 세 벌을 선보인다. 두벌은 행초서로 쓴 ‘고운최치원 선생 우흥(寓興) 시’ 8폭병과 ‘채근담 구’ 팔폭병이고, 한 벌은 예서로 쓴 ‘고운 최치원 선생 부(賦)영효(詠曉)’ 8폭병이다.


주목할 점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황소격문(黃巢檄文)’ 전문을 전지 25장에 이어 썼다는 것이다. 예서로 쓴 이 작품은 방대함도 놀랍고, 서예 작품으로 한국 최초로 서예작품화 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고운 선생의 30세손인 하림 선생은 알게 모르게 고운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황소격문’ 전문을 서예로 작품화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비문에 심취됐다.


구양순체에 바탕을 둔 고운 선생의 유려한 서예에 깊이 매료됐다. 고운 선생의 시(詩)와 문(文)으로 작품을 많이 한 것도 존경의 마음이 작동한 것이리라. 정철 선생의 ‘관동별곡’을 전지 17장을 썼다. 국한문 혼용으로 한글고체와 예서를 섞어 썼다. 장쾌함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선문(選文)은 주로 성현들의 말씀, 고전에서 취하고, 한시에서도 많이 골랐다. 직접 한시를 작시하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자작한시 ‘신록(新綠)’ 한 작품만 선보인다.


선생은 늘 내실을 중시한다. 내실이 부족하면 작은 충격에도 허물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하림 선생의 작품에는 필법의 정도에 바탕을 두고 든든하게 작품을 해오는 스타일이 그대로 보인다.


전통을 지키면서 창작을 하는 선생은 전통에 뚜렷하게 바탕을 두고 서론(書論)으로 다져서 기본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전통을 지키며 창신의 면모를 보여왔다.


“오늘날은 서예는 물론 사회 전반에서 법고(法古)는 없고 창신(創新)에만 관심을 가진 현상이 넘쳐납니다. 법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창신은 허물어지기 쉽습니다. 기초가 없으면 사상누각이 되고 맙니다. 결국에는 무너지지요. 가지와 잎만 만지지 말고 뿌리를 알아야 가지와 잎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림 선생은 서예를 하겠다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기초부터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림 선생은 대대로 직계(直系)뿐만 아니라 방계(傍系)도 한학에 조예가 깊은 가학의 풍토 속에서 성장했다.


특히 증조부는 유명한 서당 훈장이셨다. 어려서부터 천자문을 배우면서 수많은 고서들을 접했다. 특히 하림 선생보다 13살 위인 큰 형님은 서예와 한학에 뛰어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전쟁 당시에 별세해 하림 선생이 대신 그 뜻을 잇고자 서예를 하게 됐다. 하림 선생은 가학의 영향도 있었지만, 조부와 큰 형님의 뒤를 잇겠다는 뜻을 두고 어려서부터 서예를 공부했다. 그랬으니 출발부터 목적의식이 뚜렷했던 것이다. 전문작가가 되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셈이다.


선생의 학서과정에는 고난과 슬픔, 의지와 재건의 민족사와 포개어진다. 선생의 집안은 일제강점기에 축조된 충남의 봉선저수지로 인해 수몰되는 바람에 가계 경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부친께서는 한학과 서예 공부를 하다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림 선생의 뜻이 결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세류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왔다.




남보다 빨리 가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튼튼하게 토대를 쌓으면서 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걸어왔다.


하림 선생은 어려서 구양순체를 배웠다. 전문 서예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어천(於泉) 최중길(崔重吉) 선생에게서 유공권(柳公權) 해서를 배웠다. 그러나 어천선생의 건강이 허락지 않아 배움의 기간이 짧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서울로 올라와 여초 김응현 선생의 동방연서회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배운 것을 다 내려놓고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순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흔들림 없이 묵묵히 공부했다. 1982년 수유리에 관수헌서실을 연 이후도 공부는 계속됐다. 여초 선생은 매년 연초 한 달을 서예이론 강의를 했는데, 그 이론 강의가 머리에 쏙쏙 들어왔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농인 김기동 선생은 축사 ‘외길로 달려온 선비 서예가, 하림(河林) 최용준(崔容準)’에서 하림 선생을 이렇게 꼽아 설명했다. 골자만 옮겨본다.


“내가 알고 있는 하림 선생은 이렇다. 첫째, 하림 선생은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성품을 지닌서예가이다. 둘째, 하림 선생은 묵향의 현묘한 아취를 가득 담아내는, 그래서 은근하게 퍼뜨리는 진정한 ‘유어예(遊於藝)’의 향내를 발하는 서예가이다. 셋째, 하림 선생은 서예를 위한 외길 인생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일관된 사람이다. 넷째, 하림 선생은 경서의 명구를 좌우명으로 삼고, 역대 시인의 명시를 정의(情意)의 범위로 삼고, 언제나 읊조리면서 살아가는, 자기 다짐의 삶을 생활화하는 서예가이다. 다섯째, 하림 선생은 언사에 흐트러짐을 찾아 볼 수 없는, 행실이 방정하고 정제된 사람이다. 여섯째, 하림 선생은 옛 어른들처럼 예의와 범절이 바르고, 도덕적으로 품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요즈음 보기 드문 선비정신이 담긴 서예가이다. 일곱째, 하림 선생은 성실성과 책임감이 강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듬직한 서예가이다” 하림 선생의 진면목을 정말로 제대로 언급해준 글이 아닌가 싶다.


하림 선생은 서예를 하면서 처음부터 고전을 충분히 섭렵하고 수양을 많이 쌓은 다음에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었다.


여건이 갖추어지면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 오히려 천천히 공부를 충분히 한 다음에 전시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고희전이 비로소 첫 개인전이 된 연유일 것이다. 하림 선생이 인생에서 우선으로 두는 가치와 정신은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올바로 갖추는 것이다.


가정부터 올바로 다스리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의 경제를 꾸리고 예를 세우며 자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서예 역시 자신의 기본을 올바로 갖추어야 한다. 조금 늦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다져나가야 하며 반드시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신념이 지금까지 선생의 예술세계를 지탱시켜 왔던 것이다.


“강의와 외부의 일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여의치 않았으나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을 기울여 작품을 했습니다. 새벽까지 작품을 할 때도 많았지요. 오랜 시간 충분히 먹을 간 다음 종이에 스미는 좋은 먹빛을 볼 때면 희열을 느낍니다. 작품을 할 때마다 즐거웠지요. 그러한 즐거움이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서예를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논어》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하림 선생을 묵묵히 나아가게 만든 것은 가학을 잇겠다는 높은 뜻과 선천적인 인내심도 있었겠지만, 서예를 하는 즐거움이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림 최용준 선생은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로, 한국서예협회 이사·한문분과위원을 역임했으며, 한국서예협회 서울지회 상임 부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한국서예협회 서울지회 이사,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자문위원, 한국전각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서예대전, 서울서예대전 등의 심사위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부인 삼희 송희영 선생 역시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서울서예대전 초대작가로, 서울서예대전 등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 문 의 : 010-8900-1246 (하림 최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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