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돌·취석 송하진 서예초대전 「거침없이 쓴다」
2024. 9. 25 – 10. 1 한국미술관 (서울 인사동)
2024. 10. 11 – 11. 10 현대미술관 (전북 전주)
이용진 편집주간
인사동 한국미술관(관장 이홍연)과 전주현대미술관(관장 이기전) 특별기획으로 푸른돌·취석 송하진(翠石 宋河珍) 서예초대전 「거침없이 쓴다」 전시가 서울과 전주에서 열린다.
前 전라북도 도지사이자 (사)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이며, 근현대 한국의 대표적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인 강암 송성용 선생의 아들로 유명한 푸른돌·취석 송하진 선생은 서예의 대중성과 한국성, 그리고 세계성을 고민해오면서 새로운 소재와 장법(章法), 결구(結構)로 독특한 형상성과 조형성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서예가이다.
송하진, 물, 45×66cm
‘거침없이 쓰는 서예로, 화이부동(和而不同) 천진(天眞)의 세계를 펼치다’라는 주제의 이번 전시는 흔들리는 한국서예가 가야 할 새로운 변화의 길도 제시하고, 변화와 활력을 도모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점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구체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과거의 법칙이나 형식, 틀 등 인습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쓰는 서예 ▲서예작품의 소재인 한문, 일본어, 한글 등 세계의 수많은 언어 중에 한글이 주인되는 서예 ▲한글의 어순에 맞게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쓰는 서예 ▲한국적 느낌과 분위기가 우러나는 한국성을 추구하는 서예 ▲새로운 길에 따라 직접 실현한 작품 220점을 수록한 작품집 발간하고 105점을 선정하여 전시 발표.
송하진, 착하게 살자 노상 경사가 있으리라, 68×78cm
푸른돌·취석 송하진 선생의 이번 전시는 평소 정치와 행정은 붓글씨를 쓰듯 유연하게, 그리고 시를 쓰듯 진실하게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문서예가가 아니라 거의 평생을 정치행정가로 직업공무원과 민선 시장과 도지사(4선)를 역임한 사람이, 한국서예의 중흥을 기원하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초대전을 연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간 서예가로서도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취석 선생은 이미 서예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취석 선생은 유소년기와 청년기 등 성장하는 내내 거의 매일 같이 서예와 한문을 보고 들으며 자랐다. 생활 속에서 서예가 자연스럽게 “눈에 젖고 귀에 물들어 온” 소위 몸에 밴 ‘목유이염(目濡耳染)’의 저력을 가진 서예가로 통한다.
취석 선생의 조부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선생은 서예가이자 “우리의 전통을 몸체로 삼되 그 쓰임새는 새로워야 한다.”는 구체신용설을 주장한 큰 유학자였고, 그의 부친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선생은 근현대 한국서예를 대표하는 대가 중의 한 분이었다. 정계와 학계, 문학과 서화계에서 유명한 송하철, 우산 송하경, 송하춘, 이당 송현숙 선생 역시 강암 선생의 자녀이기도 하다.
취석 선생은 그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면서 우리나라 최대 서예행사인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1997년에 직접 기획하였고, 현재 세계서예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글서예의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운동에 앞장서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송하진, 꿈틀꿈틀 출렁출렁 넘실넘실, 210×150cm
취석 송하진 선생은 누구보다도 서예사랑꾼이다. 서예를 서예계 안에서만 바라보기보다는 서예계 밖에서 대중과 함께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서예의 위상은 어떠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서예는 지금 아픔을 겪으며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한 취석 선생은 아파하고 흔들린다는 것은 서예가 결코 침체하거나 위기라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서예술로 발전해가는 몸살을 앓고 있다고 보았다.
현대는 삶의 방식이 급속히 서구화 현대화 되고 빅데이터에 힘입은 인공지능 등 초지능 초연결 시대이며, 한자와 한문보다는 한글과 영어의 사용 빈도가 커진 시대인 것이다. 여기에 건축 등 물적 시설의 소재나 규모도 크게 변화하여 서예 또한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 되었다. 따라서 서예 소재로 한자, 영어, 한글 등 수많은 문자의 가치와 기능에 대한 재인식, 현대건축물과 서예작품과의 조화, 타 예술 장르와의 상호소통 교감, 멀어져가는 젊은 층의 서예 관심도 제고, 서예학과의 폐지 등에 따른 초·중·고·대학 등 서예교육의 공적제도 확립 등 그야말로 서예는 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취석 선생은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서예가 나가야 할 새로운 길로 다음을 제시한다.
첫째 ‘거침없이 쓰는 서예’를 제시한다. 거침없이 쓰는 서예란 과거의 법칙, 방식, 형식, 틀 등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쓰는 서예를 의미한다. 또한 서예가 추구하는 아름다움(美)의 개념을 ‘곱고 예쁘고 정돈된 글씨’를 뛰어넘어 ‘거칠고 흩날리고 자유분방한 글씨’ 등 그 개념을 무제한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구성과 배치 등 장법 결구도 더 자유로워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이 일부 젊은 서예가들에 의해 이미 시도되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밝다고 밝혔다.
둘째, 한글이 주인되는 서예이다. ‘서예’ 하면 한자와 한문을 위주로 배우고 작품도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변화시켜 세계의 수많은 문자를 모두 자유롭게 소재로 하되 우리 한글이 주인되는 서예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역사도 600년이 되어가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과학적이고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글씨로 인정받고 있다. 이제 우리 한글이 당연히 서예의 주인이 될 때가 된 것이다. 취석 선생은 정치행정가로서 삶의 현장에서 대중들이 현판이나 간판, 서예 작품을 접할 때마다 어려운 한자와 문장의 어순과 필순(筆順)의 반대 현상, 그리고 서체의 어려움 때문에 난감해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한글이 주인되는 서예로의 변화 필요성을 크게 느껴왔다고 하였다.
취석 선생은 한국, 중국, 일본은 같은 한자문화권이기 때문에 서예를 하는 사람끼리의 서예계 내부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중국은 한자가 주인되는 중국서예로, 일본은 일본어가 주인되는 일본서예로, 한국은 한글이 주인되는 한국서예로 발전되어야 국적이 분명한 서예술의 다양성이 이뤄지고, 그 다양성을 바탕으로 진정한 서예의 세계화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는 ‘K-서예’의 지름길인 것이다. 한글만으로도 서예가 충분히 예술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국서예가 대중성과 한국성, 그리고 진정한 세계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취지의 연장으로 선생은 아호를 말할 때 꼭 ‘푸른돌·취석’이라고 한글과 한문 아호를 함께 언급한다.
셋째, 오른쪽으로 쓰는 서예를 주창한다. 서예작품에 있어 문장의 어순(語順)은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나 글씨를 쓰는 필순(筆順)은 그 반대로 대부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것이 인습적 관행이 되었다. 오늘날 한글의 어순과 필순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따라서 취석 선생은 서예작품의 경우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오른쪽 서예를 해야 혼란을 막을 수 있고, 특히 젊은 층의 호응도를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넷째, 한국성이 있는 진정한 한국서예의 추구이다. 취석 선생은 <광개토대왕비>나 한글궁체처럼 서예작품에서 한국적 느낌과 맛, 분위기가 우러나와야 한국성이 있는 진정한 한국서예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중국서예나 일본서예와 확연히 다른 한국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끊임없는 탐색과 논쟁이 필요하다. 가령 『삼국사기』에 기록된 ‘화이불치 검이불루(華而不侈 儉而不陋: 아름답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와 같은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송하진, 가나다라, 74×72cm
서예가이자 서예평론가인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는 평론 「취석(翠石) 송하진(宋河珍)의 ‘거침없이 쓰는 서예’의 시대정신」에서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가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누구라도 과감히 나서서 ‘거침없이 쓰는 서예의 즐거움’을 알려야 서예가 산다는 절박한 생각을 하였기에 용기내어 자신의 서예를 들고 나온 것이다. (…) 취석이 들고나온 거침없이 쓰는 서예는 한국서예가 구현해야 할 시대정신이고, 한국의 서예를 진흥하는 하나의 유력한 대안이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전통서예를 알리는 효과적인 묘안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취석의 거침없이 쓰는 서예는 정직이고 질박이다. ‘티’내지 않음이다. 법서(法書) 운운하며 티를 내는 유법(有法)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법(無法)인 것도 아니다. 취석의 글씨에는 목유이염(目濡耳染: 눈에 젖고 귀에 물든다)의 눈썰미로부터 자리 잡은 허술한 듯 탄탄한 기초가 있다. (…) 취석의 서예작품을 들여다보면 취석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취석의 삶이 보인다. 취석의 청정심, 도량, 인정, 해학과 초탈이 신음(呻吟)으로 들어 있다. 그런데 그런 신음들이 그저 순수한 신음일 뿐 꾸밈이 없다. 마냥 평범한 사람의 신음일 뿐 학자연(學者然), 시인연, 예술가연하는 신음이 아니다. 시장연(市長然) 도지사연(道知事然) 하는 신음은 더욱 아니다. 밝은 눈으로 현실을 보고, 맑은 마음으로 시문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를 서예로 풀어 보자는 의미의 진솔한 신음이다. 취석의 이러한 신음은 명나라 말기에 문단 혁신을 주도한 공안파의 문예이론과도 상통한다. (…)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서예이자 서예혁신(Movement)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송하진, 사랑, 68×44cm
미술평론가인 한국미술비평연구소 장준석 대표는 평론 「붓 하나로 화이부동 천진의 세계를 펼치다」에서 “한학을 비롯하여 서예이론에 정통한 취석은 다양한 서체를 연구하면서 특히 ‘한국성’에 큰 관심을 두고, 한국서예의 활성화와 세계화 방안을 모색해왔다. 그가 한국성을 지닌 한국서예의 창출에 주목하게 된 것은 대중들이 서예를 접할 때마다 어려운 한자와 서체의 난해함 때문에 당황해하거나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서예를 오늘의 현실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아가 “구수한 큰 맛 같으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서체를 구사한 취석의 서예는 개성 있으면서도 특별한 면들을 내재하여, 특별한 형상미와 조형성을 맛볼 수 있게 한다. 자작시의 시상이 느껴지는, 담담하게 써 내려간 독창적이고도 유연한 서체에는 우리의 정서가 담겨 더욱 한국적이며 생동적이다. 정치와 행정가 이전에 한평생 서예와도 함께 살아온 그는 한국의 대표적 서예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취석의 작품은 ‘그림으로 쓰여’ 있기도 하고 ‘글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 글자지만 그림이 되어 있고, 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중득심원(中得心源: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깨닫다)에서 발원된 절묘한 붓놀림에는 유연함, 맑음, 천진함이 함께하여, 마치 ‘무미(無味)의 미’ 같은 큰 맛과 구수함마저 있다. ‘한국성이 농후한 서예’, ‘대중과 함께하는 서예’, ‘한국인의 삶과 함께하는 서예’를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취석의 자세는 사회적 환경, 대중의 취향과 의식 등에서 드러나는 미적 조형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다. 그가 평생 염원해 왔던 바처럼, 우리의 현대 서예는 시대가 변하는 것만큼 새로움을 모색하면서 발전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는 특히 한국성의 중요함이 간과되면 안 된다.”고 평하였다.
송하진, 청산은 나를 보고, 70×68cm
푸른돌·취석 송하진 선생은 “서예란 문자를 소재로, 일회적 운필에 의한 추상적 형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행위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 계승되며 인문적 의미를 표출하는 문자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서예의 기본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먹으로 글씨를 쓰고 붉은 도장을 찍는 흑백주(黑白朱)의 조화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의 법고(法古) 즉, 수련 과정을 거쳐 필력을 길러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취석 선생 역시 여느 서예가와 마찬가지로 50대 후반까지는 구양순, 안진경, 동기창, 황산곡, 하소기, 왕탁, 우우임 등 주로 중국서예를 보고 읽으며 공부하였다. 그러나 60대가 되면서 서예의 대중성과 한국성, 그리고 세계성을 고민하면서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 원교 이광사, 소전 손재형, 강암 송성용, 일중 김충현, 남정 최정균, 평보 서희환을 비롯하여 현대 한국서예가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예술적인 면에서 한국서예의 빼어나고 무궁한 발전 가능성을 인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주창하는 ‘거침없이 쓰는 서예’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취석 선생은 이번 초대전과 작품집에서 거침없이 쓰는 서예, 한글이 주인되는 서예, 오른쪽 서예, 한국성을 추구하는 서예를 유감없이 선보인다. 작품의 다양성과 대중성을 향한 노력 또한 크게 돋보일 것이다.
푸른돌·취석 송하진 선생은 전시를 앞둔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누구나 꿈이 있듯이 저 송하진은 어려서부터 글 잘 짓고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는 42년이란 제법 긴 세월을 행정과 정치마당에서 일해왔습니다. 그러나 공심으로 전심전력했던 그 힘든 세월에도 저의 꿈은 결코 작아지지 않았고 물레질은 계속되었습니다. 행정과 정치의 길에서 떠나온 후엔, 미친 듯이 서예에 몰입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도 다시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간 제가 서예에 대해 품어왔던 문제점도 개선이 되어서 서예가 새롭게 발전해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송하진, 청산에 살어리랏다, 45×135cm
푸른돌·취석 송하진 선생은 1952년 강암 송성용 선생의 아들로 태어나 1980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행정공무원으로 24년간 봉직하다 명예퇴직하고, 2005년 정계에 입문하여 전주시장 8년, 전라북도지사 8년, 지역과 국가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전통적 분위기의 가문에서 자라고 현대적 교육을 받은 취석 선생의 학문적 소양과 예술적 기질은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세계적 명소가 된 전주 한옥마을을 가꾸고, 유네스코음식창의도시와 국제슬로시티로 부각시켰다. 홀로그램산업, 전라감영복원, 문화관광재단 설립, 전북문학관과 국악원,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중흥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6월말 정계에서 은퇴하고 서예와 시문학에 전념하고 있으며, (사)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과 서울시인협회 고문, 전주와 전북 문인협회, 시인협회, 강암연묵회 등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송하진, 해달별꿈…, 120×150cm
조부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부친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선생의 영향으로 문학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50대 중반까지는 중국의 유명 서예가들의 비첩을 주로 공부하였고, 정치의 길에 들어서면서 서예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어 광개토대왕비, 판본체, 궁체 등 한글서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정치가로 활동하는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아 4,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얼굴 없는 천사비>, <애국지사장현식선생기적비>, <한옥마을 풍낙헌>, <부안내변산월명암>, <세계평화명상센터대웅보전> 등 상당수의 현판과 비문, 제호 등을 남겼다. 정책학 전공서인 『정책성공과 실패의 대위법』을 스승이신 김영평 교수님과 공동으로 저술하였고, 정치관련 대담집으로 『송하진이 꿈꾸는 화이부동 세상』이 있으며, 시집으로 『모악에 머물다』와 『느티나무는 힘이 세다』가 있다. 서예작품집으로 『거침없이 쓴다, 푸른돌 취석 송하진』 이 있다.
송하진, 《거침없이 쓴다》, 국배판, 올칼라,
이화문화출판사刊, 320p, 정가 1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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