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운학 박경동(云鶴 朴慶東) 선생이 고희를 맞아 개인전을 연다. 1996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과 2007년 미국 워싱턴 레이크우드시 초대 개인전 이후 세 번째 개인전이다. 지난해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3인3색전에서 문자의 원시성과 모필의 자유분방하고 강렬한 필획을 선보였던 작가가 다채로운 시문으로 매력적인 필획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작은 ‘떨림(振)의 미학’을 구현하였다. 작가에게 ‘떨림’은 필(筆)로 시작하여 문장과 스승의 눈빛을 거쳐, 기록으로 남김과 몸으로 이어진다. 운학 선생은 자서에서 “서예는 떨림이다”라며 이렇게 밝혔다. “먹을 갈고 붓을 잡으면 항상 나의 손은 떨림이다. 소년시절 먹을 갈고 붓을 잡았으나 뭐를 쓸 줄 몰라서 떨렸으며, 청년시절 스승님의 눈빛에 떨렸으며, 장년시절에는 기록되어 남는다는 것을 알고 떨렸다. 나이 칠십에 들어서자 자동적으로 손이 떨려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더 떨린다.”라고 하였다.
‘떨림(振)’이라는 단어 하나에는 운학 선생의 몸과 마음과 예술가로서의 총체성을 담고 있다. 시간이라는 물리성, 창작자로서의 끝없는 창신(創新)을 향한 막막함과 간절한 심리성, 기록을 남기는 예술작품으서의 역사성과 영원성이다.
이번 전시작은 ▲여류작가의 시 ▲역대작가의 시 ▲만해 한용운 시 ▲운학 박경동 시, 이렇게 네 파트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먼저 <여류작가의 시> 파트에서는 역대 유명 여성 시인들의 시를 선(選)하여 썼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삼의당김씨(三宜堂金氏, 1769~?)는 99편의 시와 19편의 산문을 수록한 『삼의당고(三宜堂稿)』 두 권을 저술한 시인이다. 남편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砬)은 부인이 거처하는 집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렸다 한다.
매창(梅窓)이라는 자호로 유명한 계생(桂生, 1573~1610)은 부안의 명기(名妓)로, 짧은 일생이었지만 시문을 좋아하여 한시, 가사(歌詞), 시조 등 다방면에 능하였고, 노래와 춤, 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하였다.
황진이(黃眞伊, ?~?)는 중종(中宗) 때의 개성 명기(名妓)로, 시서(詩書)와 음률(音律)에 능통하였다. 출중한 미모와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 15세에 기적(妓籍)에 투신한 이후 당대의 문인 명유와 교유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영수합서씨(令壽閤徐氏, 1753~1823)는 조선 후기의 여성시인으로, 두시 차운(次韻) 등 차운시가 많고 당시풍(唐詩風) 취향이 엿보인다. 승지 홍인모(洪仁謨)에게 출가하여 홍석주(洪奭周), 홍길주(洪吉周), 홍현주(洪顯周)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모두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계월향(桂月香, ?~1592)은 조선 중기 평양의 의기(義妓)로, 임진왜란 때 김응서와 함께 왜장을 죽이고 자신의 죽음도 스스로 받아들였다. 훗날 조정에서 의기(義氣)를 가상히 여겨 평양 의열사(義烈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만해 한용운은 <계월향에게>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신씨(愼氏) 부인은 거창신씨 신현(愼晛)의 맏딸이자 참판 경취(慶冣)의 부인으로, 남편이 호남경시관이 되어 임지로 갈 때 남편을 따라가면서 고향에 대한 염려와 고향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을 시에 표출하였다.
박죽서(朴竹西)는 박종언(朴宗彦)의 서녀로 『죽서시집(竹西詩集)』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총명하였으며, 책을 좋아하여 소학·경사·옛 작가의 시문을 바느질과 함께 익혔다고 한다. 중국의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 시인들의 시를 골라 25편의 한시는 국한문 혼용으로 작품을 하였고, 3편의 시조도 한글로 쓰거나 한문과 섞어 썼다.
두 번째는 <역대작가의 시> 파트로, 역대 명시와 문장에서 선하였다.
한(韓)·중(中) 시인들을 가리지 않았고, 유명한 문인, 학자, 시인은 물론 삼국유사(三國遺事), 청구풍아(靑丘風雅), 악장가사(樂章歌詞), 고려가요(高麗歌謠), 주역(周易) 등에서도 시문을 골라 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한문이 혼용되기도 하고, 한시와 시조, 현대시를 자유롭게 넘나들기도 한다. 전시 작품 전체 가운데 할애한 분량도 가장 많기도 하지만 자유롭고 다채로운 구성과 분방한 필획을 구사한 점이 돋보인다.
세 번째 파트인 <만해 한용운 시> 부분은 한용운의 시만 골라서 작품을 하였다. 만해 한용운의 한시(漢詩) 2편과 한글시 33편 등 35편의 시문을 골라 작품을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선생은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한 승려이다. 또한 시인으로, 일제강점기 때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족적은 깊고 넓으며, 시문에서는 높은 상징성 또한 읽어낼 수 있다. 만해 선생의 시는 진솔한 정감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 세속적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고 참된 민중 지향의 진가가 드러난다.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찬 분위기가 시의 주조를 이루는데, 이는 불교의 관음사상에 기인한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한시·가사·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한과 눈물의 애상적 정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류작가의 시에서 역대 명가의 시문을 거치면서 내적 정서에 면면히 흐르는 정감, 애환, 사랑, 자연, 그리움, 정절, 떨침과 수용을 담아낸 시미학은 만해 한용운의 시를 거쳐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 마지막 파트인 <운학 박경동 자작시>로 이어진다. 만해 한용운의 시와는 반대로 자작시 가운데 한시 11편과 한글시 1편을 골라 작품하였다. 자작시 작품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겸양의 측면도 있지만 마침이라는 구도로서의 의중도 있다. 즉 자작 한시와 해석을 썼지지만 역대 시문도 서슴없이 함께 담았다. 역대 명시와 명문은 따로 있지 않고 작가의 자작시에 면면히 흐를 뿐만 아니라 필묵으로도 고스란히 발현된다는 것을 상징한 의도이다.
전시 작품의 필묵 특징을 살펴보자.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먼저 필묵의 자유로운 활용을 들 수 있다. 비수(肥瘦)와 대소(大小)의 대비가 뚜렷하면서도 상보(相補) 균형을 이룬다. 다양한 농담(濃淡) 변화로 입체감을 획득하였다. 또한 전통 서법 위에 캘리그라피 느낌을 풍요롭게 살려 현대미감을 잘 드러냈다.
뛰어난 공간 경영도 돋보인다. 채움과 비움을 통한 소밀의 조화미를 잘 구현하였다. 전체적으로는 방형(方形)을 이루고, 트임[疎]과 흐름[流]으로 부드러움[曲]을 작품 전반에 부여하였다. 이로써 정련함과 방일(放逸)함이 공존하며 정서적 소통을 이루어낸다.
전체 구성방식(format)의 일관성도 특이한 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방형(方形) 작품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작가의 의도이다. 작품 좌상(左上)에 중심어 혹은 제목을 두었고, 우측에는 원문을, 좌하(左下) 혹은 하단에는 해석 및 낙관을 썼다. 이 일관된 포멧이 단조로움을 벗어나 시각적 풍요로움을 획득하려면 서폭(書幅) 경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일한 포멧이지만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생기를 불어넣었다. 대소의 변화, 농담, 강약의 변화, 대비와 조화, 강조와 균형으로 작품 구성의 묘를 잘 살려냈다. 운학 박경동 선생의 이번 고희전 작품들은 일관된 구성과 주제의식, 뛰어난 서폭 경영과 완숙한 필묵의 구현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전시장을 직접 방문, 작품을 관람하며 전시회를 축하해 주어 의미가 더욱 컸다.
운학 박경동 선생은 2022년 윤석열 대통령 취임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현판과 윤석열 대통령 명패를 직접 제작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